20년 전 성경공부 함께하며 천주교·개신교 넘어선 교류
김한수 기자

오늘은 지난 10월 초 세상을 떠난 성악가 김청자 선생님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종교 담당 기자가 성악가 이야기를 하겠다니 좀 의아하시겠지요. 저는 김 선생을 12년 전 뵙고 인터뷰한 적이 있습니다. 당시 고희를 맞은 선생님은 생애 처음이자 마지막인 책 ‘김청자의 아프리카 사랑’(바오로딸)을 펴내고 바쁜 시간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그가 바빴던 이유는 아프리카 말라위에서 자신이 음악을 가르치는 학생 11명을 데려와 서울 국립극장에서 공연을 앞두고 있었기 때문이지요. 말하자면 당시 인터뷰는 성악가로서가 아닌 신앙인으로 봉사하는 이야기였습니다.
선생님을 뵌 첫인상은 ‘환하다’ ‘따뜻하다’는 것이었습니다. 표정에서 사랑이 흘러넘치고 있었습니다. 말라위 아이들을 향한 모성애 같은 사랑의 느낌이었습니다.
알려진 것처럼 김 선생님은 입지전적인 인물입니다. 강원도 춘천 태생으로 서울 진명여고를 졸업한 그는 성악가를 지망했지만 당시 가정 형편이 어려워 간호조무사로 독일에 갔습니다. 그렇지만 꿈을 포기하지 않았지요. 그는 열한 살 때 가톨릭 신앙을 받아들였지요. 그는 인터뷰 당시 “열한 살 때 성당에서 하느님과 피아노를 만났다”고 표현했었습니다. 가톨릭 신앙이 그의 인생에 큰 도움이 됐습니다. 그는 독일로 건너갈 때에도 독일 신부의 도움을 받았고 현지에서 주변의 도움을 받아 음대에 진학해 장학생으로 성악을 공부했습니다. 1970년 유럽 무대에 데뷔했는데 한국 성악가로서는 처음이라고 합니다. ‘한국인 최초 유럽의 프리마돈나’라는 별칭으로 불렸습니다. 지금 전 세계 무대를 누비는 한국 성악가들을 생각하면 격세지감을 느끼게 하지요.
스위스 베른오페라단, 독일 카를스루에 국립오페라단의 단원으로 활동하고 유수 무대의 프리마돈나로 활약했습니다. 그렇지만 그는 어머니를 모시고 동생들을 돌보기 위해 귀국해 중앙대와 연세대 음대 교수로 일한 후 다시 유럽으로 건너갔다가 한국예술종합학교(한예종)가 개교할 때 귀국해 1994년부터 2009년 정년 퇴임 때까지 교편을 잡았지요.
성악가로서 삶이 인생 1막이었다면 2막은 봉사였습니다. 아프리카 말라위라는 나라로 건너간 것이죠. 말라위는 동부 아프리카의 탄자니아, 모잠비크, 잠비아와 국경을 맞대고 있는 작은 나라입니다. 한예종 교수 시절 안식년을 맞아 세계를 여행하면서 아프리카 봉사를 꿈꿨고, 주변의 권유로 말라위를 소개받았다고 합니다.
그는 퇴임 후 마지막 남았던 경기 양지의 전원주택도 처분했습니다. 당시 집 판 돈 5억원 중 2억원을 말라위 청소년 돕기 후원회에 내놓고 삶의 근거도 말라위로 옮겼지요. 그리고 현지에 음악학교를 열었습니다. 인터뷰 당시 그는 “악보 볼 줄을 몰라도, 듣기만 하면 그대로 따라 하는 독특한 천재들”이라고 말라위 아이들의 음악적 재능을 칭찬했습니다.

김청자씨가 아프리카 말라위 아이들과 함께 노래 부르는 모습. /바오로딸 제공
그 당시 김 선생님이 에세이를 낸 이유도 말라위 청소년들을 돕기 위해서였습니다. 책과 공연 티켓 판매 수익 모두 말라위로 보낸다고 했습니다. 당시 선생님은 유쾌했습니다. 스스로 인생을 돌아봐도 ‘진취적’이라고 했지요. 이런 농담도 했습니다. “어렸을 땐 외모에 콤플렉스가 많았어요. ‘넌 시집가면 남편이 돈 많이 들겠다. 얼굴이 넓어서’라고 놀림받을 정도로 얼굴 크고, 미간(眉間)이 넓어서요. 그래도 웃으며 여기까지 왔어요. 하느님이 주신 DNA일까요?”
12년 전 김 선생님을 인터뷰를 하면서 고 이태석 신부님 생각이 많이 났습니다. 두 분 모두 어려운 가장 형편에서도 각각 성악가와 의사라는 꿈을 이뤘습니다. 그것만으로도 어려운 일인데 두 분 모두 자신의 달란트를 아프리카의 어린이와 청소년을 위해 아낌없이 나눴습니다. 음악 사랑도 겹칩니다. 이태석 신부님은 의사로서 환자를 돌봤지만 남수단 아이들을 모아 브라스 밴드를 만들어 함께 연주하며 음악을 통해 사랑을 나눴지요. 김 선생님은 음악학교를 만들었고요. 이태석 신부도 현지 아이들의 음감(音感)을 칭찬했던 기억이 납니다. 이태석 신부님이 남수단 아이들을 한국으로 유학시켜 의사로 성장시켰듯이 김 선생님도 말라위 아이들을 한예종에 유학시키기도 했습니다. 이태석 신부는 ‘친구가 되어 주실래요’, 김청자 선생은 ‘김청자의 아프리카 사랑’이라는 책을 딱 한 권씩 낸 점도 닮았습니다.

'김청자의 아프리카 사랑' 표지. /바오로딸 제공
저는 그렇게 김청자 선생님과 인터뷰로 한 번 만났습니다. 단 한 번의 만남이었지만 말라위 아이들 이야기를 하면서 얼굴 가득 퍼지던 환한 미소는 항상 제 머릿속에 남아 있었습니다.
김 선생님의 소식을 다시 접하게 된 것은 올해 1월 이주연 산마루교회 목사님의 ‘산모퉁이 돌고 나니’ 칼럼을 통해서였습니다. 이 목사님은 ‘그분이 답장을 보내와 너무 기뻤다’는 제목의 칼럼에서 김청자 선생님의 암 투병 사실과 함께 아름다운 인연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당시 칼럼에서 이 목사님은 ‘월간조선’에 실린 김청자 선생님의 인터뷰를 읽고 암 투병 사실을 알게 돼 전화로 문안 인사를 나눴는데 그때 김 선생님이 “모든 것은 다 주님의 은혜”라고 말해 그 자체가 이 목사님에게 큰 위로가 됐다고 적었습니다. 그 후 김 선생님의 생일을 맞아 축하 문자를 보내려다가 혹시 병세가 악화돼 메시지를 받을 수 없게 되셨다면 어쩌나 망설이다가 문자를 드렸는데 답장을 받고 너무나 기뻤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칼럼에도 두 분이 첫 인연을 맺은 것은 20여 년 전 이 목사님이 인도하던 성경 공부 모임에서라고 했습니다. 김청자 선생은 천주교 신자인데 이 목사님과 함께 성경 공부를 했다니 색다르게 보였습니다.
김청자 선생님이 세상을 떠난 후 그 칼럼 생각이 나서 이 목사님께 카톡을 드렸습니다. 목사님은 해가 떨어진 후에 전화를 주었습니다. 강원 평창의 야산을 개간해 농사를 짓는 이 목사님은 요즘은 맨발로 걸을 수 있는 ‘묵상의 길’을 내고 있다고 했습니다.

산마루예수공동체 이주연 목사. /박성원 기자
두 분의 인연이 궁금했습니다. 20여 년 전 이 목사님은 산마루교회의 전신이 된 성경 공부 모임을 이끌고 있었습니다. 지식인이 많았다고 합니다. 김 선생님은 당시 한예종 정년을 앞두고 있었는데 백의현 전 이화여대 음대학장의 소개로 성경공부 모임에 동참했다고 합니다. 천주교와 개신교의 차이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고 합니다. 김 선생님은 기도 중에 경험한 신비로운 은혜 체험을 이 목사에게 고백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김 선생님 댁도 방문한 적이 있는데 기도실을 따로 만들어 놓고 아침저녁 1시간 이상씩 기도하는 모습을 보면서 수도자 같다는 강한 인상도 받았다고 했습니다. 김 선생님 초청으로 이 목사님은 성당에서 열리는 바자회에 참석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이주연 목사가 김청자씨에게 선물 받은 '부활의 아침에 무덤으로 달려가는 제자 베드로와 요한'. /이주연 목사 제공
어느 날 김 선생님은 유럽을 다녀오면서 그림 사진 한 장을 이 목사에게 선물했다고 합니다. 파리 오르세 미술관에 소장된 ‘부활의 아침에 무덤으로 달려가는 제자 베드로와 요한’이란 제목의 스위스 화가 외젠 뷔르낭의 작품입니다.
이 목사님은 이 사진을 금빛 액자에 넣어 지금도 교회 사무실에 두고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 사진을 촬영해 김 선생님께 생일 축하 문자와 함께 보냈다고 합니다. 김 선생님은 답장에서 “제 생일을 기억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파리 오르세 미술관에서 그 작은 그림을 발견했을 때 제 가슴은 기쁨으로 터질 것만 같았습니다. 예수님을 향한 사랑으로 빛나는 두 남성의 눈을 볼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이 목사님은 칼럼에서 “부활 소식에 달려가는 그림 속 두 남성과 그 그림을 보고 기쁨으로 터질 것만 같았던 한 여성의 가슴은 이미 부활의 소망으로 죽음을 넘어선 세계로 발을 들여놓은 것은 아닐까!”라고 적었습니다.
어쩌면 이때 이 목사님은 김청자 선생님과 이 세상에서의 작별 인사를 주고받았는지 모르겠습니다.
지난 10월 초 이 목사님의 휴대폰에 김청자 선생님의 이름으로 부고 문자가 왔다고 합니다. 이 목사님은 이 부고를 받고 세 줄짜리 답장을 보냈다고 합니다. 세 문장은 이렇습니다.
“아름다웠습니다. 거룩하게 되셨습니다. 주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으셨습니다.”
이 목사님은 “김 선생님은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는 그런 영역에 들어가신 분”이라며 “육신이 떠나는 거야 그리 큰일이 아닌 분이어서 딱 세 마디면 충분했다”고 말했습니다.
김청자 선생은 지난해 ‘월간조선’ 9월호 인터뷰에서 ‘남은 삶에 대한 아쉬움’을 묻는 질문에 “전혀 없다”면서 “저는 참 복된 삶을 살았다고 생각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면서 마지막으로 남기고 싶은 말을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각자의 소명을 가지고 이 세상에 태어납니다. 그 소명을 따라서 묵묵히 살아가면 되는 거예요. 삶은 가치 있는 것들로 반짝이는 세상입니다. 그 반짝임을 향해 노력한다면 누구나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다고 믿습니다. 모두가 자기만의 소명으로 세상을 아름답게 비추어 보기를 바랍니다.”
이 목사님이 원래 신문사에 보낸 칼럼 제목은 ‘죽음을 넘어선 믿음과 평안’이었다고 합니다. 김청자 선생님의 삶과 잘 어울리는 제목이라고 생각합니다. 김 선생님의 영원한 안식을 빕니다.
출처: 조선일보(2026.10.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