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가

애국지사 엄주신

칠원의 死守 독립운동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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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영환 집사와 청년들의 칠원교회 및 칠원의 사수

1950년 6월 25일 주일 새벽에 남침한 공산군의 만행은 이루 말 할 수가 없었다.
6.25 사변으로 인하여 사살된 장로교 교역자 약 300명, 감리교 교역자 약 80명, 성결교 교역자 약 20명, 구세군 약 8명 등 모두 408여명이며 불타 버린 교회가 1,273 교회나 되었다(장희조 저 '한국장로교회사' p.326).

칠원에도 공산군의 남침은 예외가 아니었다.
황철도 목사가 후퇴명령을 받고 남강에서 배를 타고 내려와 구혜교회에서 주일 예배를 드리고 “교회당 지붕에 붉은 십자가를 그리시오, 그러면 유엔군이 폭격을 하지 않는다”고 했다. 함안읍 각디미 산에서 괴뢰군이 포를 쏘기 시작했다. 칠원이 위급하게 된 것은 낙동강 연안 4km 이내에는 무조건 철수 후퇴한다는 명령을 내렸기 때문이었다. 함안경찰서는 관할 지서에 지시를 못해서 구혜교회는 예배를 드리게 되었다.

유엔군 정찰기가 구혜지서에 순경이 있는 것을 보고 괴뢰군이 점령한 줄 알고 폭격기를 불러 폭격을 시작했다. 교회는 폭격하지 않았다. 예배 후에 구혜교인이 전부 칠원으로 왔다. 오렬분자가 일어나서 혼란을 일으켰으나 죽창에 맞아 모두 죽었다. 경찰, 군인 모두 칠원을 떠나 피난을 갈 때에 엄영환 장로를 비롯하여 교회청년들이 단합하여 총을 얻어 무장을 했다. “칠원에 있는 재산과 생명을 보호하겠다. 우리가 싸우겠다” 고 다짐했다.

대산지서장은 경찰서 경비 전화를 하여 ‘괴뢰군이 아직 오지 않았다’고 보고하고 도경에서는 피난 명령을 해제시켰다. 당시 칠원을 사수하기로 결의하고 나선 분들은 엄영환, 엄문섭, 김차석, 김도식 등 7명과 일반 청년 15명이었다.

얼마 후에 괴뢰군이 유원까지 진격하여 집집마다 불태워 버리고 마흔실 산을 넘어 왔다. 교회 청년들은 그 순간 마을 창고에 숨어 있었다. 엄영환 장로는 그 순간을 이렇게 증언한다. “처자 생각은 없고 부모 생각만 나는데 주여 이 순간 내 영혼을 부탁합니다”라고 기도드렸다고 한다.

성도들이 교회당에서 그 난리 통에서도 기도를 드리는데 정찰기 소리가 나더니 조명탄이 터지고 유엔군의 폭격 소리가 지축을 울렸다. 칠원을 진격해 오던 괴뢰군이 다 죽었다. 곤천내 다리 밑에 숨어 있던 괴뢰군은 빨가벗긴 몸으로 포로가 되어 끌려오고 있었다(칠원교회 80년사 p.208-2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