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가

애국지사 엄주신

조선의 기독교 지도자 대학살

01

칠원교회사를 중심으로

장성옥 목사는 오호리 교회에서 주일 예배를 드리고 칠원으로 오다가 8 · 15 해방을 맞이했다. 칠원을 향하여 걸어오던 중 송정 주재소에 오니 해방을 맞이한 지역 사람들이 지서에 모여 있고 일본 순경들은 벌써 도망을 가고 없었다. 지서 기물이 파손되어 있고 서류가 흩어져 있는데 그 서류 하나를 주워 보니 피암살자 명단이 있었다. 당시 일본 정부에서는 조선 목사 장로들 때문에 조선 식민지 통치가 잘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여 독립운동에 가장 적극적인 기독교인 25,000명과 일반인 15,000명 모두 40,000명을 암살시키기로 하고 서울 모 지하실에 4만명을 한꺼번에 가두고 고압선을 넣어 1945년 8월 17일 0시를 기해 암살키로 계획이 완벽하게 수립되어 있었다. 함안 지역 피암살자 명부에는 군북 조용석 장로, 칠원 엄주신 장로와 엄영환 집사였다. 하나님은 옥중에 있는 모든 主의 종들과 암살 직전에 있던 주의 백성 25,000명을 위하여 8 · 15일 해방을 허락하시고 4만명 암살을 명령했던 총독은 국제재판을 받았다(칠원교회사 p. 148)

02

국사편찬위원회(위원장 이만열) 자료

한글자료

(1-1) 일반 서민들과 마찬가지로 기독교인의 대부분은 면종복배하였다. 이러한 높은 공감대야 말로 흉폭무도한 권력에 대항하여 불굴의 저항운동을 계속 전개시킬 수 있었던 최대의 기반이라고 생각된다.

어느 해 총독 미나미가 제국회의에서 시정보고를 할 때, 어느 대의사가 “조선 통치는 원활히 행해지고 있는가?” 하는 물음에 “조선에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40만의 군대가 있는데, 그것은 예수교도들입니다”라고 대답하였다고 한다. 이는 미나미의 기독교회관(觀)과 탄압의 동기를 보여 주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이것은 미나미에만 그치지 않는다. 그 후임인 고이소, 아베(阿部信行)도 조선 교회를 완전히 해체하여 일본 교단의 산하에 두고, 신사참배 거부자 등을 모두 투옥하였지만 오히려 불안을 떨쳐 버릴 수 없었다. 패전 직전 “미군이 필리핀을 함락시켰을 때 일본군 지도자는 미 · 소가 조선에 진격해 올 것을 예상하고 조선인 기독교인이 거기에 협력할 것을 두려워하여 1945년 8월 중순경 조선인 기독교인을 모두 살해하도록 본격적으로 계획하고 있었다”고 블레어(W.N.Blair)는 기록했으며, 마펫(S.H.Moffett)은 그 처형이 8월 18일로 예정되어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문정창(文定昌)은 그 살해 예정 數는 약 5만명으로, 영변에서는 2시간에 20명씩 살인할 능력을 가진 일본군인에 의하여 죽창과 일본도로 찔러죽이는 방법으로 2만 7천명의 살해를 예정했던 약 20평의 살인굴이 前 특고형사(崔雲霞)의 안내로 확인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1-2) 우리는 여러 정보원으로부터 미군이 필리핀을 점령하자 일제 군부지도자들이 미 · 소군이 한국을 공격할 것을 예상하고 한국 기독교인들이 연합국을 도울까 염려하여 1945년 8월 중순에 실제로 한국 기독교인들을 학살할 계획을 세웠다는 보고를 받았다.

영문자료

About a month before the end of the war the final blow was delivered. All denominational distinctions were ordered abolished, and all the churches were squeezed into one tightly controlled organization, the united "Korean Christian Church of Japanese Christianity." Christians were shocked when a Shinto priest led a procession of Christian pastors to the Han River for the opening ceremony of purification. It was a bizarre and frightening spectacle, explaining, perhaps, some of the passion of later church controversies over collaboration and throwing light on Korean Christianity's present resistance to proposals for church union.

전쟁이 끝나기 약 한 달 전에 마지막 일격이 가해졌다. 모든 교파의 구분을 철폐하라는 명령이 있었고, 모든 교회들이 철저하게 통제되는 하나의 조직인 “일본기독교 조선교단” 속으로 밀어 넣어졌다. 기독교인들은 신도의 사제가 기독교 목사들을 이끌고 한강으로 가 재례를 개시하는 의식을 하는 것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 그것은 기괴하고도 무서운 장면이었으며 아마도 지금의 한국 기독교가 교회 연합에 빛을 던지는 일과 합작사업에 대하여 가지게 되는 열띤 논쟁을 설명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A few days after this forced union large numbers of church leaders were arrested, including even some of those who had co-operated with the government. On the day of the Japanese surrender, they were released. Only later was it discovered that their execution had been ordered for August, 18. The surrender was August 15. Japan's early capitulation after the Hiroshima bombing saved more than American and Japanese lives.

But contrary to all their expectations, liberation, so deliriously greeted by Korean Christians, only exposed them to deadlier peril. Communists in the north, and schisms in the south confronted the church with unexpected danger.

이 강요된 연합이 있은지 며칠 후 정부에 협조했던 이들을 포함하여 많은 수의 교회 지도자들이 체포되었다. 일본이 항복하던 날 그들은 풀려났다. 나중에 그들의 처형이 8월 18일에 잡혀있었다는 것이 밝혀졌다. 항복은 8월 15일이었다. 히로시마 폭격 이후 일본의 빠른 항복이 미국과 일본 사람들의 목숨만 살린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한국의 기독교인들이 그렇게도 기쁘게 맞이했던 해방은 그들의 기대와는 달리 그들에게 다가오는 치명적 위험을 보여줄 뿐이었다. 북쪽의 공산주의자들과 남쪽의 분열로 교회는 생각지도 못한 위기를 맞게 된다.



※참고- 증손자 엄준용 목사(총신신대원 99회)의 ‘한국교회사 과제’ 중에서 관련부분 발췌

부흥운동과 사상적 혼란기를 거쳐 1935년부터 1945년까지 한국교회는 生死의 기로에 놓이게 된다. 신사참배는 기독교 신앙의 왜곡이냐 수호냐의 심각한 위협을 가져왔던 문제로 전 교회와 민족이 당한 수난이었다. 신도는 고대 일본으로부터 이어져 내려온 천왕숭배사상으로 메이지유신을 거치면서 국가주의적 종교가 되었고 일본 기독교의 전체적인 분위기는 이것을 국가 예의로 받아들이는 분위기였다.

일본은 1898년 남산공원에 ‘태신궁’을 만든 이래로 준비를 진행하여 1931년 만주사변 개시와 함께 한국인 전체에 분명한 종교인 신사참배를 강요하기 시작했다. 일본은 특히 미션스쿨에 신사참배를 강요했고 1935년 北장로교 선교회는 학교를 잃더라도 교회를 살리기 위해 타협하지 않고 신사참배 거부를 결의한다. 그렇지만 천주교회와 감리교회는 국민의례로 보고 신사참배를 공식화하였고 이에 영향을 받은 캐나다 · 호주 · 북장로교는 지켜보는 입장이었다.

이때 풀톤의 1937년 ‘풀톤성명’을 앞세워 南장로교는 미션스쿨을 폐쇄하면서까지 타협하지 않았고 이후 北장로교와 호주장로교도 이런 입장에 따랐으나 캐나다장로교회는 유보적 입장이었다. 총독부의 무력시위로 인해 1938년 총회에서 신사참배 결의를 가결하지만 주기철, 이기선, 한상동, 손양원 목사, 한부선 선교사 등이 중심된 신사참배 반대운동이 일어나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평양신학교 학생들이 신사참배 반대운동에 앞장서게 되었고 박관준 장로, 김선두 목사와 같은 개인과 함께 주기철목사와 산정현교회의 강력한 신사참배 반대운동이 일어난다. 그렇지만 1938년 평양신학교가 폐교되고 1940년 신학지남이 폐간되었으며 주기철 목사는 1944년 옥중에서 순교하기까지 신사참배 반대운동의 최선봉에 서서 신사참배에 반대한다.

또한 한상동 목사는 경남 지역에서, 손양원 목사는 순천 애양원과 전남지역에서 신사참배 반대운동을 주도했고 약 50여명의 인물들이 순교하고 2천여명이 투옥되었다. 이러한 투쟁에는 선교사들도 적극 참여하였고 헌트와 바이램은 옥고를 치르기까지 했지만 1938년의 참배 결의 이후 변한 한국인 지도자들의 입장으로 인해 그 입지를 점점 잃게 된다. 항거의 동력이 되었던 것은 성경에 대한 불변의 확신과 전천년주의 종말론이었다.

신사참배 반대는 단순한 신앙적 행위가 아니라 민족적 운동이었음을 기억해야 한다. 한상동 목사는 특히 증조부님이 분립 선언을 하셨던 고신 측 목사님이셨고, 손양원 목사님과 그 아버지 역시 증조부님의 고향 분으로 신사참배 반대에 앞장섰던 분들이다. 특히 이때 조부 故 엄영환장로님은 신사참배를 반대했다 하여 호리라는 일본 순사에게 매일 끌려가 시멘트 바닥에 꿇어앉아 매를 맞고 돌아오는 것이 일과였다 한다.

그러던 어느날 길을 가던 호리 순사가 갑자기 고꾸라져 죽었고 이를 본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존재를 더욱 알게 되었다 한다. 조부님의 동생들 되시는 작은 할아버지 쌍둥이 두 분도 신사참배에 반대하다 칠원공립보통학교에서 퇴학당하였고, 이후 두 분 중 한 분은 만주로 가셨는데 아직까지 생사를 알 수 없다. 신사참배 반대에 대한 글을 읽을 때마다 가슴이 두근거린다. 할아버지와 아버지에게서 어릴 적부터 들어오던 목숨을 건 신앙의 자세에 대해 들었던 기억이 되살아나기 때문이고, 신학도로써의 마음가짐을 새롭게 하는 계기가 되기 때문이다.

과연 지금 다시 그러한 핍박이 닥친다면 주기철 목사님처럼 一死覺悟의 정신으로 맞설 수 있겠는가? 내 한 몸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아내와 아이까지 死地로 내몰면서 신앙의 굳은 절개를 지킬 수 있겠는가? 신앙의 선조들의 발자취를 보면서 숙연해지고 다시 신앙의 각오를 다지게 되는 것이다. 신사참배에 굴복한 분들에 대하여는 어떻게 할 것인가? 분명한 것은 성경의 용서는 회개가 전제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아직까지 신사참배에 대하여 그 불가피성만을 외치며 회개치 않는 이들에 대해 어떻게 용서가 있겠는가?

목숨을 걸고 신사참배에 반대한 자랑스런 믿음의 선진들의 피가 땅에서 호소하고 있는데 말이다. 타협과 굴종하였던 이들이 그 이후 역사의 과정에서 계속 지도자로 남아있었음을 보라. 어쩌면 그들로 인해 교회는 사회적 책임의 생명력을 잃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사회의 강력한 압력에 직면하여 신앙적 양심이 도전받을 때 우리의 태도가 어떠해야 할 것인지에 대해 신사참배 문제는 역사 속에서 우리에게 말하고 있다.

특히 1940년에서 1945년까지는 민족 전체가 극심한 가난과 핍박을 견뎌내어야 했는데 이것이 바로 신사참배에 대한 타협에서 시작되었음을 볼 수 있다. 1938년의 결의 이후 한국교회와 지도자들은 신민화 통치와 내선일체 정책에 대한 적극적인 후원자로 바뀌게 된다. 1939년 창씨개명을 통해 정체성을 말살하고, 종교단체법으로 도시마다 교회를 통합하였고 교회는 심지어 군수물자의 공급에 앞장서게 된다.

신사참배 반대조치로 평양신학교(이하 평신)가 폐교된 후 일제는 오히려 교회의 황국신민화작업을 가속하기 위해 평신을 복구하였다. 한편 1940년 조선신학교가 설립되는데 1953년 분열시 사용되는 ‘기독교장로회’라는 명칭을 이미 사용하게 되었다. 조선신학교는 선교사로부터의 장로교 복음주의 전통과 단절, 친일적 기독교 교역자 양성이 목적이었고 이는 복구된 평신이나 겨우 명맥을 유지하던 감신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일본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조선교회와 일본교회의 단일화 작업에 착수하였다. 일제는 우선 일본 내에서 기독교에 대한 대대적인 박해와 함께 교단 통합을 추진하여 1941년 일본기독교단을 결성하고 또한 한국 내에서도 감리교단의 통합에 이어 1942년 교단들을 일본기독교 조선혁신교단을 만들었다. 신학교들도 어용으로, 특히 감신은 일본신도학교로 만들어버린다. 일반학교들도 戰時체제에 휘말려 일본의 세계제패 음모에 이용당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 가장 혹독한 박해를 받은 교파는 1943년 해산당한 동양선교회 성결교회와 많은 목회자들이 투옥되고 1944년 해체된 동아기독교, 그리고 1943년 해산된 안식교로 한결같이 그들의 재림신앙으로 인해 일제의 눈 밖에 났으나 타협하지 않고 해체된 경우였다. 이제 더 이상 버티기 힘들게 된 외국선교회들은 한국에서 철수하게 되어 1940년 크리스마스까지 90%의 선교회 요원들이 한국을 떠났고 1941년 12월 태평양전쟁이 발발하면서 그나마 남아있던 선교사들도 다 출국할 수밖에 없었다.

선교사들의 철수 후 각 교단에서는 일제의 전쟁 수행에 적극 동참하여 성금을 모으거나(장로교) 교회를 팔아(감리교) 물자를 조달했다. 1945년 8월 1일 드디어 한국개신교단 전체를 통합한 ‘일본기독교 조선교단’이 태어났다. 심지어 일제 군부지도자들은 한국 기독교인들이 연합국을 도울 것을 우려해 1945년 8월 17일 한국교회 지도자 2만여명 학살 계획을 세우기까지 했다. 그러나 그 2일 前 해방이 온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하나님의 놀랍고도 극적인 섭리요 개입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 당시 증조부 故 엄주신 장로님과 조부 故 엄영환 장로님도 8월 15일에 검거되어 서울로 압송된 후 투옥되어 8월 17일 0시에 조선총독부 건물 지하에서 유태인들이 학살당했듯이 살해 당 하였을 것이다.

만약 15일에서 하루만 해방이 늦었더라도, 어찌 될 뻔 했을까? 아버지(엄동규 장로)께 이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섭리하신 기적이 아니고는 달리 설명할 방법이 없었다.

여호와를 영원히 찬송할찌어다 아멘 아멘(시 89:52).

조선의 기독교 지도자 대학살에 대한 日帝의 계획서와 피암살자 명단을 입수하려 수년간 노력하고 있으나 아직 구하지 못하였습니다. 혹시 여기에 대한 자료나 정보가 있으신 분은 꼭 연락바랍니다. 후사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