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가

애국지사 엄주신

신사참배 가결 및 회개

01

신사참배 가결

제27회 총회(1938. 9. 9~15) 평양 서문밖 총회장 홍 택 기
*신사참배 가결하다.

제30회 총회(1941. 11. 21~26) 평양 창동 총회장 최 지 화
*1941. 11. 22 제30회 총회 총대 일동이 개회 다음달 아침 평양 신사에 참배하다.

02

신사참배 회개

제32회 총회(1946. 6. 11~14) 서울 승동 총회장 배 은 희
*1938년 제27회 총회시 가결한 신사참배는 전국 교회의 신앙 부족으로 일제의 강압에 의하여 저지른 잘못으로 알고 회개하고 이를 취소하다.

제39회 총회(1954. 4. 23~27) 안동 중앙 총회장 이원영
*제27회 신사참배 결의를 취소하고 성명서 발표하다.
*신사불참배 교역자와 신자, 또 선교사를 제명한 노회, 학교, 각 기관에 명하여 그 기록을 취소키로 가결하다.

03

고신 발족

제37회 총회(1952. 4. 29~5. 2) 대구 서문교회 총회장 김재석

"고려신학교와 그 관계자들[경남(법통)노회]은 총회와 하등의 관계가 없다는 총회 측의 再 言明과 경남(법통)노회 대표로 발언한 嚴柱信長老의 고별선언을 최후로 고려학교를 중심한 경남(법통)노회는 총회와 결별하였다."

고신 교회의 역사에 대해 연구하면서 고신 교회 역사의 바로 이 부분에 나오는 엄주신 장로에 대해 항상 궁금해하던 이상규 교수(고신대 교회사학)는 월간고신 생명나무 2009년 5월호에 다음과 같은 글을 기고하였다(필자의 허락을 받고 게재함).

한국교회의 숨겨진 인물들⑮
하나님 사랑과 조국 사랑으로 일생을 사신 엄주신장로


이상규 교수 프로필

고신대학교 교회사학교수이며, 고신역사박물관장이다.

이상규 교수 저서

[교회개혁과 부흥운동], [헬라로마적 상황에서의 기독교]외 다수가 있다.


[월간고신 생명나무 2009년 5월호, pp.60-63]

하나님 사랑과 조국 사랑으로 일생을 사신 엄주신 장로

대한예수교장로회 고신교(단)회의 출범과 관련한 문서에 보면, 경남법통 노회측 총대가 축출 당하게 되자 “엄주신 장로의 고별선언으로...” 총회장을 나왔다는 기록이 나온다. 나의 책에서도 이 점을 인용한 한바 있다 “1952년 4월 29일 대구 서문교회당에서 열린 제37회 장로교 총회에서 경남법통노회 총대가 다시 참석하여 총회와의 관계정상화를 힘썼으나 동 총회는 경남법통노회가 파송한 12명의 총대를 제명처단하고 ‘고려신학교와 그 관계단체와 총회는 하등의 관계가 없다’는 재 언명으로 총회는 경남법통노회를 총회 밖으로 축출하였다. 이 때 경남법통노회 총대였던 엄주신 장로가 고별선언을 함으로 그 동안 시도된 총회와의 관계정상화는 수포로 돌아가고...”

고신의 역사를 공부하기 시작하던 때 맞닥뜨린 ‘엄주신’이란 이름이 늘 내 머리에 맴돌았다. 그는 어떤 분이었을까? 장로인 그가 왜 고별선언을 하게 되었을까? 그렇다면 그는 경남법통노회에서 어떤 위치를 점한 분이었을까? 이런 의문을 갖고 있던 중 부산에 위치한 부전교회 엄옥련 권사를 만나게 되었고, 그가 엄주신 장로의 손녀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말하자면 그는 엄주신 장로의 장남인 엄영환 장로의 장녀였다. 이제 오랜 의문이 풀리기 시작했고, 칠원 지방을 순회했던 호주선교사가 말하는 ‘엄 장로’(Eum of Chilwon)가 바로 엄주신 장로임을 확인하게 된 것이다. “칠원교회 엄 장로는 한의사로서 기풍이 당당하고 체격이 크신 분으로 함안지방의 지도적 인물로서 위엄과 권위를 지니신 분이며 신앙심이 깊고...손종일 장로와 함께 칠원교회를 이끌어가는 분이다” 한 이국인 순례자의 눈에도 엄주신 장로는 기풍이 당당한 애국자이자 믿음의 사람으로 비쳐졌듯이 그는 경남, 특히 함안지방의 지도적 인물이었다.

엄주신(嚴柱信 , 1890~1973)은 1890년 4월 15일 함안군 칠원면 구성리 728번지에서 엄순업(嚴順業)의 차남으로 출생했다. 향리에서 한문을 배우며 성장한 그는 유가적(儒家的) 전통에 만족하지 못하고 새로운 학문에 눈을 뜨게 된다. 19세가 되던 1909년 10월3일 임명남과 결혼하였고, 칠서면 무릉리 274번지에 이적하였다. 그 후 슬하에 3남 6녀를 두었다.

칠원에서 예수를 믿게 된 그는 1910년 6월 17일 방명원 조사로부터 학습을 받았다. 방명원 조사는 1910년 칠원교회에 부임한 최초의 한국인 교역자라고 할 수 있다. 1913년 3월 5일에는 평북 선천 주재 미국 북장로교 선교사였던 남행리(Henry W. Lampe)로 부터 세례를 받고, 이듬해 칠원교회 서리집사가 되었다. 이때부터 그는 신앙인이자 애국자로서의 길을 갔다.

그 첫 사례가 1919년 만세운동에의 가담이었다. 칠원에서의 경우 만세운동은 손종일과 엄주신의 지도로 박경천(朴敬天), 윤사문(尹士文) 등을 중심으로 기획되었다. 이들은 밀회를 거듭한 끝에 3월23일 만세운동을 벌이기로 모의했다. 이날이 칠원 장날이었기에 효과적인 시위일로 본 것이다. 이날 오후 4시경 장터에 모인 1천여 명의 주민들에게 태극기를 나누어 주고 독립선언식이 거행되었다.

이 일은 3월 19일의 함안읍 의거와 3월 20일 군북에서의 만세 시위에 이은 이 지방의 중요한 만세운동이었다. 손종일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후에 태극기를 들고 시가행진에 들어갔다. 시위 군중은 칠원 시가지를 행진하였다. 마산 경찰서의 지원을 얻은 왜경은 선두에서 만세를 부르고 군중을 선동하던 황영환, 신영경, 신영수 등을 체포하였다. 이어서 착검한 총칼로 군중을 위협하였다.

4월 3일 칠원 장날에는 2차 만세시위가 일어났다. 이때는 1차 의거 때 보다 3백여 명이 더 많은 1천 3백여 명이 회집했다. 이런 독립운동과 관련하여 체포된 엄주신은 1919년 5월 20일 부산지방법원 마산지청에서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8월형을 언도받았으나, “내 나라를 찾기 위한 것이 어찌 죄가 될 수 있느냐”며 항소했다.

그러나 1919년 6월 10일 대구복심법원(고등법원) 형사 1부에서 조선총독부 검사 노구찌(野口)가 간여한 심리에서 “피고 엄주신은 조선 독립의 여망을 달성할 목적으로 원심 공동피고 손종일이 발의한 모의에 동참하여 원심 공동피고 박경천, 윤형규 등과 손잡고 구(舊) 한국 대형 태극기를 들고 소형 태극기를 제작 준비하여 1919년 4월 3일 오후 3시경 전기 손종일 등과 7~8명이 칠원 장날 군중 안에 들어가 미리 계획된 순서에 다라 피고 엄주신 장로로 하여금 태극기를 군중에게 배포하고 손종일 등과 같이 대형 태극기를 높이 쳐들고 대한독립만세를 크게 선창하면서 읍내를 누볐다.

그러므로 원판결은 지당한 것이므로 항소 이유는 없다. 따라서 형사 소송법 제261조 제1항에 준하여 항소를 기각한다. 대구 복심법원 형제558호의 판결로 형이 확정된 엄주신 장로는 대구 감옥에서 8개월의 옥고를 치렀다. 이런 독립운동에 대한 기여로 엄주신 장로에게는 1992년 4월 13일 대통령표창(제83803호)이 추서되었으며, 2001년 7월 27일에는 국가유공자(제40-17720호))로 추서되었다. 2002년 10월 31일, 그의 유해가 국립대전현충원 애국지사 제2묘역(1015번)에 이장되었다.

엄주신은 애국자이기 전에 하나님을 두려워했던 신앙인이었다. 만세운동으로 옥고를 치른 그는 변함없이 믿음의 길을 갔고, 1922년 이전에 영수가 되었다. 칠원교회 1922년 1월 2일 당회록에 ‘엄영수 주신’이란 기록을 보면 그 이전에 영수가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 때 그는 교회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감당하고 있었다. 1924년의 칠원교회당 건축 때도 그는 헌신적으로 봉사했다. 함안군 칠서면 무릉리에서 한의원을 개원하고 있던 그는 칠원 교회까지 4Km되는 거리를 오가며 교회당 건축을 감독하였고, 재정적인 지원은 말할 것도 없고 교회의 모든 뒷바라지를 감당했다고 한다.

엄주신 영수는 1931년 1월 25일 칠원교회 장로로 피택되었고, 1933년 1월 26일에는 손종일에 이어 칠원교회 제2대 장로가 되었다. 손종일은 순교자 손양원의 선친이었다. 이런 신앙의 여정 속에서 경남지방 교계 지도자로 활동하게 된다. 특히 그가 경남지방을 대표하는 인물로 신망을 얻게 된 것은 신사참배 반대와 투쟁이었다.

1935년 이후 신사참배가 문제시되기 시작하였고, 1938년 이후에는 ‘시국인식’이란 이름으로 신사참배 요구가 거세졌다. 다수의 교계 인물들이 불가피한 적응이란 이름으로 신사참배에 순응하거나 어떤 이는 면종복배의 길을 갔으나 엄주신 장로는 이 점에 있어서 단호했다. 이미 독립운동으로 일제와 맞섰던 그는 요시찰인물로 일경의 감시를 받고 있었다.

그러나 엄주신 장로는 신사는 명백한 우상숭배이자 신앙과 양심에 반하는 일이라 하여 강력하게 거부했다. 이 일로 그는 함안경찰서로 불려가 취조와 고문을 당하기도 했다. 그는 가족들에게는 말할 것도 없지만 교우들과 한의원을 찾아오는 환자들에게도 신사참배 강요의 부당성을 고취하였다.

그의 장남 엄영환 장로(1914~1993)가 신사참배 반대로 고문과 투옥을 당했던 것도 신앙의 결단이지만 부친의 영향이 컸다. 당시 엄영환은 칠원교회 청년이었으나 신사참배를 반대한다 하여 함안경찰서로 불려가 취조와 고문을 당하고 수난의 날들을 보냈다.

그는 후에 부산 부전교회 장로로 일생을 부전교회와 교단(합동)을 위하여 헌신했고 교회와 사회의 지도자로 활동했다. 엄주신 장로의 쌍둥이인 2남 엄문섭과 3남인 엄무섭은 칠원공립보통학교 4학년에 재학 중이었으나 신사참배와 ‘히노마루’(日の丸), 곧 일장기에 대한 배려 거부로 어려움을 겪었고 결국 퇴학처분을 받았다.

이 때 손양원 목사의 두 아들 손동인과 손동신도 동일한 이유로 퇴학처분을 받았다. 국기에 대한 배례는 국가에 총성을 맹세하는 국민의례이며, 동시에 국가에 대한 충성심을 시험하는 수단이었다. 따라서 이를 거부하는 것은 ‘비국민’의 행위이며 국가에 대한‘불경’,혹은‘반역’을 의미했다. 엄주신 장로의 가정은 손종일 장로 가정과 함께 하나님 사랑과 조국 사랑을 함께했던 믿음의 동지였다.

엄주신 장로는 일생동안 한의사로 살았다. 20대 청년 때 한의학에 관심을 가지고 정진한 결과 1914년 3월 20일에는 한의사 면허(제483호)를 취득하였고, 그의 일생동안 한의사로 활동하게 된다. 그는 함안지방과 서부경남에서 이름난 한의사가 되었고 병마에 시달리는 백성들에게 인술을 펴는 존경받는 의사가 되었다.

당시 함안 지방과 전국에서 이질이나 설사 환자가 급증했을 때 일본인 의사에게 치료를 받던 환자들의 거의 다 사망했으나, 그에게 치료를 받았던 환자는 모두 살았다고 한다. 이런 일로 서부 경남에서는 아주 용한 한의사로 소문났고, 수많은 환자들을 치료하여 의술을 통해 복음을 널리 전하게 되었다고 하다.

그가 바로 경남법통노회의 지도자로서 부당한 교권에 대항하여 총회석상에서 고별선언을 하고 물러나 고신측교회 설립에 기여했던 것이다. 엄주신 장로는 하나님 사랑과 조국 사랑, 그리고 병든 환자에 대한 연민의 정으로 일생을 사셨던 믿음의 사람이었다.

04

엄주신장로와 아들들의 신사참배 거부/반대 운동

* 왜경(倭警)에 의해 요시찰인(要視察人)으로 지목된 故人은 신사참배를 반대하다가 1935년부터 함안경찰서로 끌려가서 모진 취조와 고문을 끝없이 당했다. 그러나 엄주신 장로는 자녀들, 교회 성도들 및 치료를 위하여 한의원을 방문하는 환자들에게도 신사참배 거부와 민족혼을 심어 주었다.

* 1935년부터 故人의 장남 영환집사도 신사참배를 반대하므로 칠원에서 약 17km 떨어진 함안경찰서로 매일 아침 9시에 자전거로 출근하여 취조와 고문을 받고 오후 5시에 집으로 돌아왔고 엄영환집사가 끈질기도록 항복을 하지 않으므로 일본 형사들 중 가장 악질적이며 유도 3단인 고등계 ‘호리(堀)’형사에게 취조를 맡겼고 그 호리(堀) 형사는 엄집사를 끌고 가면서 심하게 때리고 짓밟다가 넘어져 죽었다. 그 때 그 광경을 보고 있던 박경희 전도사가 놀라서 졸도를 하게 되자 일본 공의가 진찰을 하고 같이 검속이 되어 있으면서 폐가 나빴던 주상수 장로와 함께 박경희 전도사는 김해경찰서로 移監이 되었다.

* 1937년 5월 故人의 子 쌍둥이 문섭(1923~2002)과 무섭(1923~1950)은 칠원공립보통학교 제4학년 재학 중 기독교 교리에 어긋나는 신사참배 및 일장기 배례 의식을 반대하다가 퇴학 처분을 받았다(칠원교회사 p.159~161)

* 1937년 10월 20일 제85회 칠원교회 당회는 “오는 12월 노회에 헌의건은 일반 신자로 신사에 대한 태도를 지시하여 달라는 것을 회중이 가결하다”(칠원교회사 p.167)

* 1945년 8월 당시 일본정부에서는 조선 목사, 장로들 때문에 조선 식민지통치가 잘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여 독립운동에 가장 적극적인 기독교인 25,000명 일반인 15,000명 모두 40,000명을 암살시키기로 하고 서울 모 지하실에 4만명을 한꺼번에 가두고 고압선을 넣어 1945년 8월 17일 0시를 기해 암살키로 계획이 완성된바 있고 그 명단에 엄주신장로와 장남 엄영환집사가 있었다. 하나님은 옥중에 있는 모든 主의 종들과 암살 직전에 있던 主의 백성 25,000명을 위하여 홀연히 8.15 해방을 허락하시고 4만명 암살을 명령했던 총독은 국제재판을 받았다(칠원교회사 p.148~149)

05

엄영환 집사와 일본형사


“앞서 간 믿음의 선진들과 함께 신사참배라는 사신우상을 국가의식이란 이름으로 조선기독교 총회가 결의하고 일본 총독부의 권력을 앞세워 나올 때 정면 도전하여 직접 싸웠고 내가 공산주의와 맞서 싸운 것도 교회를 사수하는데 목적이 있었다.”


안정덕 김동개 집사 등 여러 성도 들은 간단하게 조서를 마치고 돌아갔다. 최후에 엄영환 집사는 취조문서 9장 분량의 많은 조서를 받았다. 취조를 받는 중에 형사가 엄집사에게 묻기를 “이찬수씨가 칠원교회는 신사참배하면 안된다고 하지 않았는가?”

엄집사는 “성경대로 독실하게 살아야 한다고 했지 신사참배를 꼬집어 말한 일은 없다”고 말했다. 결국 혼자서 유치장 생활을 계속하게 되었는데 변기통 옆에 앉아서 찬송을 부르다가 “예수님의 고난이 나에게도 오는가!” 하는 것을 생각하니 무척 기뻤다고 한다. 가장 심하게 맞은 것은 아침에 일어나면 기도, 저녁에 잠자기 전 취침기도 하는 것 때문이었다. 시간이 가도 굽히지 않자 나중에는 미친 사람이라고 하면서 집으로 보냈다.

그러나 하루도 빠짐없이 ‘신사참배 거부’라는 문제 때문에 경찰서로 불려 가거나 감시를 받는데, 일본이 대동아 전쟁을 하다가 최후 발악을 하면서 한국청년들을 유혹하여 ‘청년정신대’를 조직했다. 대동아전쟁 후원 단체였다. 엄집사는 이것을 적극 반대하므로 매일 아침 9시에 함안경찰서로 자전거로 갔다가 취조를 받은 후 오후 5시에 집으로 오는 것이었다. 40일을 굴복하지 않고 다니니까 40일 만에 세멘트 바닥에 꿇어 앉혀 놓고 머리를 치고 침을 뱉으면서 하는 말이 “영리하기는 한데 예수에 미쳐서 못쓰겠다”고 했다.

그 때 마음속에는 ‘예수님 때문에 핍박 받는 것이 제일 좋다, 죽으면 급행열차 타고 천당 바로 간다고’ 믿었다고 한다. 이렇게 끈질기도록 항복을 하지 않으니까 일본 형사들은 가장 악질적인 형사에게 맡겨서 취조를 받아 항복을 받으려 했다. 그 형사의 이름은 호리(堀)인데 일본 사람이면서도 유도가 3단이었다.

호리(堀)는 엄집사를 끌고 가서 나무 의자에 앉혀 놓고 성경을 인용해 가면서 고문을 시작하는데 “성경에 네 오른편 뺨을 치면 왼편 뺨도 돌려 대라 했는데 그렇게 하겠느냐?” 고 묻자 엄집사가 “예”라고 대답하기가 무섭게 오른편 뺨을 후려쳤다. 왼편 뺨을 돌려주었다. 계속 맞으니 나중에는 감각을 잃고 아프지 않았다. 호리(堀)는 힘이 없어 못 때리고 엄집사는 목이 아파 돌아가지를 않았다. 다음에는 신사 앞으로 끌고 갔다. 안 가려고 하니까 죽여 없애버린다고 하면서 몽둥이로 마구 때렸다. 역시 마비가 되었는지 아프지 않았고 코피만 흘러서 길바닥엔 유혈이 낭자했다. 12시가 되어 경찰서로 끌려 나오는데 마음속에는 ‘하나님께서 참새 한 마리도 허락지 않으면 죽지 않는데 나도 네가 아무리 죽이려고 하여도 하나님이 죽이지 않으면 결코 죽지 않는다’는 확신을 가졌다고 한다.

마침내 호리(堀)는 엄집사를 끌고 가면서 때리고 짓밟다가 自己가 넘어져 죽게 되었다. 그 때, 그 광경을 보고 있던 박경희 전도사가 놀라서 졸도를 하게 되자 일본 공의가 진찰을 하고 같이 검속이 되어 있으면서 폐가 나빴던 주상수 장로와 함께 박경희 전도사는 김해 경찰서로 이감이 되었다.

그 후, 함안 경찰서 관내에는 “하늘의 아들을 때려서 제가 역으로 맞아 죽는다”는 말이 퍼지기도 했다. 엄집사는 3일을 출근하지 못하고 서서히 안정을 회복했다. 그 후부터는 유치장 앞 세멘트 바닥에 꿇어앉는 형을 받아야 했다. 고성 출신인 경찰관인데 예수 믿은 지 6개월 된 사람이 함안 경찰서로 왔다. 이 사람이 엄집사를 많이 도와주었는데 나막신(찌까다비)을 신고 와서 신호를 하는데 경찰관이 오면 딸그락 딸그락 소리를 내면 꿇어앉았다가 지나가면 서서 쉬기도 했다. 세멘트 바닥에 종일 꿇어 앉아 있기는 실로 불가능한 고통이었다.

하루는 경무주임이 부르더니 “당신 건강이 좋지 않으니 나가라”고 했다. 시간은 밤 12시였다. 나는 나갈 수 없고 여기(유치장)에 있겠다고 하면서 되려 유치장으로 들어갔다. 그랬더니 경무주임은 “당신이 여기서 죽으면 우리가 큰 일 나니까 나가라”고 했다. 막상 경찰서에서 나와 보니 갈 곳이 없어 읍내에 살고 있던 누나 집을 찾아갔다. 자정이 넘어 깊은 한밤중이었으나 누님은 “어서 하나님께서 동생을 도와 돌아오게 해 달라”고 기도하는 중이었다고 한다.

누님 댁에서 편히 자고 일어나서 아침9시에 다시 경찰서로 들어갔다. 경찰서에서는 틀림없이 엄집사가 아침 9시만 되면 들어올 줄 알고 차를 대기하여 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경무주임이 옆에 타고 칠원까지 왔다. 칠원지서 주임을 찾아가서 “엄영환씨를 다시는 경찰서로 보내지 말라”는 부탁을 하고 돌아갔다.

경찰서에서 돌아 왔을 때 마산에서는 김○○ 목사를 강사로 도제직사경회가 열리고 있었다. 집회 도중 “내일 새벽기도회는 한 분도 빠짐없이 나오시오. 내일 새벽기도회는 간단히 하고 신마산 신사 앞에 가서 신사참배하고 상부에 보고할 것입니다. 버스도 준비되어 있습니다” 하고 광고를 했다. 새벽기도회를 갔다가 축도할 때에 빠져나와 화장실에 가서 숨어버렸다. 그래서 또다시 신사로 끌려가는 화를 면했고 그렇게도 가혹한 고문을 하던 일본 형사 호리(堀)는 칠서 지서로 왔다가 졸도하여 죽어 사람들이 석유 한말 장작 석짐으로 태워 장사를 지내버렸다.

교회마다 신사가 있었으나 칠원교회는 없었다. 한번은 성전을 집회소로 부득이하게 빌려 주어 일본 서장이 담배를 피우려고 할 때 엄격하게 막아 성전의 신성함을 가르쳐 주었다. 해방이 가까워 올 무렵 신궁을 넘어뜨리고 불을 지르기도 했다. 신사를 불 지르자 즉시 일본 헌병이 올라 와서 누가 신사에 불을 질렀냐고 묻자 정규옥씨가 “점심을 먹고 있는데 수많은 군중이 몰려들어 그랬는데 누가 주동을 했는지 모르겠다”고 하고 점심을 먹고 있는 엄 집사에게 최점봉 씨가 찾아와서 “속히 도망을 가라”고 하여 죽음을 면하기도 했다(칠원교회사 p.145~148)

06

요시찰인(要視察人) 엄영환 집사

엄영환 집사는 왜경(倭警)에 의해 요시찰인으로 지목되어 칠원을 벗어날 때마다 사전에 ‘칠원지서’에 여행 목적과 행선지를 신고해야 했고, 특히 서울로 출타 시는 칠원을 출발하면 마산경찰서로 연락이 되어 구마산역에서 고등계형사(정보 형사)가 기차를 타는 것을 확인하고, 삼량진역에서 형사가 서울행을 확인하고 서울에 내리면 고등계 형사가 따라 다녔고 칠원으로 돌아올 때도 기차역마다 형사들이 확인하고 인계 하였다.

07

엄영환 집사의 손동인, 동신 순교 위로 방문

1948년 10월 20일 전라남도 여수와 순천이 공산군들의 반란으로 장악이 되었다. 철저한 신앙교육을 받은 손양원 목사의 아들인 동인, 동신 형제는 학교에서 공부를 하면서도 틈틈이 전도하고 공산주의는 용납할 수 없다는 사상운동을 하다가 순교를 당했다.

동인, 동신군의 장렬한 순교 소식을 들은 교회는 엄영환 집사를 순천으로 보내어 5,000원의 헌금을 전달하였다. 그 당시 순천, 여수 일대는 공산도배들의 횡포가 너무나 무서워 민간인 출입이 완전통제 되었으므로 민간인 출입이 어려웠다. 그러나 엄영환 집사는 교인의 신분으로 마산에서 군함을 타고 여수항에 내려 손목사님의 가족을 만날 수 있었다.

08

한국교회가 해야 할 참회고백

우상숭배의 죄는 다른 죄와 성격이 다르다. 하나님께서 가장 미워하시는 죄악이다. 한국교회가 이제라도 과거사를 범교단적으로 온전히 참회하면, 하나님께서 긍휼을 베푸셔서 남북을 갈라놓은 38선이 사라지게 될 것이다. 진정한 회개는 죄를 용서받고 통일을 앞당기게 한다.

일제시대에 저지른 행악과 과거사 청산문제에 관련하여 한국교회가 참회고백을 하고 왜곡된 역사를 바르게 기술해야 할 점들은;

최덕성 교수


고신대학교와 미국 노스캐로나이나대학교, 리폼드신학교(M.Div.; M.C.E.), 예일대학교(S.T.M.), 에모리대학교(Ph.D.)에서 각각 수학했다. 영국 케임브리지대학교에서 수학했고, 미국 하버드대학교의 객원교수(1997~1998)였다. 장로교 목사이며, 여러 해 목회를 했다. 1989년부터 고려신학대학원-고신대학교 교수로 봉직했다.


(1) 우상숭배-신사참배, 황거요배

(2) 교역자들의 신도세례(미소기바라이)-천조대신 외에는 참 신이 없다고 한 신앙고백,

(3) 배교-기독교 신학을 신도주의에 맞게 개조한 일, 여호와 하나님과 천조대신(가미)을 함께 섬긴 일, 일본왕을 現人神으로 인정하고 이른바 천조대신이 여호와 하나님보다 더 높다고 고백한 일, 각 교회의 대표자들이 그 같은 신술에 서명한 일, 그리스도의 유일성을 포기한 일, 그리스도의 통치를 불신하고 거부한 일, 그리스도의 재림을 부정한 일, 그리스도의 왕권, 통치, 재림, 천년왕국에 관한 성경 일부를 삭제한 일, 이 같은 내용이 담긴 찬송가를 삭제한 일. 그리스도의 교회를 훼파한 일, 교회의 신조와 신앙고백을 배약한 일, 각종 배도신앙고백서를 발표한 일, 발표한 배도신앙고백서대로 실천한 일,

(4) 민족배신과 백귀난행-황군의 전승기도회, 전승축가예배, 전쟁무기 제공, 지원병과 성정신대에 나가도록 강연한 일, 헌금을 병기구입에 바친 일, 교회당 종과 철문을 뜯어 병기제작에 바친 일, 교회당을 팔아서 戰費로 사용토록 바친 행위,

(5) 한국교회 조직을 신도주의 종교단체, 곧 이단으로 개편한 일, 순정일본적기독교라고 하는 신도교로 개종한 일,

(6) 국가의 교회간섭에 항거하지 않은 일, 시대적 책임과 사회적 책임을 다하지 못한 일, 악의 세력에 항거하지 않는 일,

(7) 우상숭배를 거부하는 동역자를 파면, 해직, 제명, 추방한 일, 그 가족을 추방한 일, 신사참배를 거부하는 동료를 왜경에게 고발하여 체포되게 한 행위와 신자들에게 우상숭배를 강요한 일

(8) 형제자매, 동족, 동료 교역자와 그 가족에게 무정했으며, 무고히 핍박받는 신앙 동지와 동족을 돌아보지 않았을 뿐 아니라 어리석은 신앙을 가졌다고 폄하한 일 등이다.

그리고 과거사와 관련하여 한국장로교회가 저지른 것으로 참회하고 청산해야 하며 역사를 바로 세워야 할 것들은 다음과 같다:

(9) 과거사청산, 역사바로세우기, 참회고백, 공적참회권징(자숙)등의 거부,

(10) 우상숭배를 거부한다는 까닭으로 제명당한 한부선 목사에게 해벌을 통고한 교권 횡포,

(11) 고려신학교에 대한 각종 모함, 독설, 부당한 처사, 기존의 경남(법통)노회를 불법으로 단절한 일, 총회가 불법을 행하면서 경남 친일파의 손을 들어주어 교회를 분열시킨 일, 교회분열의 책임을 고신계 출옥성도들에게 뒤집어씌운 일, 신앙 승리자들을 향하여 적대감을 가지고 시기한 일,

(12) 치리회 질서(헌법)를 무시하고 위반한 일,

(13) 교권주의, 형식지상주의, 교회주의에 빠진 일,

(14) 개체 교회를 분열시키고 이간한 일,

(15) 출옥성도들을 자칭 의인, 독선주의자, 신성파, 분리주의자, 바리새주의자로 몰아 부친 일, 우물에 독뿌리기식 폄론, 무고히 독성을 내뱉고 폄하한 일.

(16) 교회의 기초를 허무는 미신적 결정을 하고 행사를 가진 일

(17) 주기철 목사 복권 결의와 선포, 순교자를 상품화하고 순교자 영웅주의를 조장한 일, 가룟 유다의 은전 헤아리기-주기철 자파의 위상 향상과 정통성 확보 수단을 이용한 일,

(18) 신사참배의 죄를 다만 행정상의 실수로 여겨 “취소성명서”를 채택한 일, 한국교회가 일제 말기의 사건과 관련하여 자신을 단지 일제의 피해자로만 생각한 일, 반세기 동안 공적 참회고백을 지연한 일,

(19) 한국교회사를 당파적 시각으로 기술하고 아전인수격, 견강부회식으로 해석한 일,

(20) 친일파 전통의 고착을 묵과하고 친일파 인사들의 착종논리를 용납하고 또 교회의 성경적 좌표 설정에 무관심한 일 등이다.

2006년 1월 16일 금마복음교회에서 열린 제46회 정기총회에서 기독교대한복음교회(회장:나명환 목사)가 교단 창립 70주년을 맞아 교단 창립자인 최태용 목사의 친일행적에 대한 죄책고백을 결의하고 초대감독 최태용 목사 친일행적에 대한 ‘죄책고백문’을 발표, “하나님과 민족과 역사 앞에 엎드려 회개”한다고 한국 개신교단 최초로 친일 행위를 회개했다.


신사참배의 罪를 다만 행정상의 실수로 여겨 “취소성명서”를 채택한 일로 끝낼 것이 아니라, 위 ‘기독교대한복음교회’와 같이 ‘죄책고백문’을 발표하고 국내외(國內外)의 한민족 교회 공동체 전체가 기간을 정하고 금식하며 티끌과 재 가운데서 깊이 통회자복하고 회개하여야 할 것이다(욥 42: 6)

이 일을 위하여 긍휼히 풍성하신 하나님 아버지께 뜻을 정하고 깊은 기도를 드리고 있으며, 하나님의 은혜로 오대양육대주의 한민족공동체 교회 전체가 ‘죄책고백문’을 발표하고 회개하는 기회가 속히 오도록 성도 여러분의 힘을 합한 기도를 요청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