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가

애국지사 엄주신

칠원 장날 의거 독립운동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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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원 장날 의거 ('함안 항일독립운동사' 이규석 저 p.69-72, p.285-286)

엄주신(嚴柱信)지사는 1890년 4월 15일 함안군 칠원면 구성리 728번지에서 출생하여 1909년 결혼 후에 분가하여 칠서면 무능리 274번지로 이적하였다.
어려서부터 학문에 전념하여 장래가 촉망하다는 중평(衆評)을 받았으나 조선 말기 매관매직이 성행하니 이를 통탄하고 성리학(性理學)에 몰두하던 공부를 실사구시(實事求是)하는 실학(實學)에 전념하여 집안 어른들에게 호된 꾸지람을 들었다.
그러나 성리학(性理學)의 공리공론(空理空論)으로는 나라를 되찾고 백성을 구휼(救恤)하는데 미흡하다고 판단하고 한의학(韓醫學)에 정진하여 향내(鄕內)에서 널리 존경을 받는 한의사(韓醫師)로 성장하였다.

엄주신 지사는 식민 정치(植民政治)의 가렴주구한 착취로 헐벗고 굶주리며 병마(病魔)에 시달리는 주민을 구휼(救恤)하는데 앞장을 섰다. 그러나 2천만 동포가 앓고 있는, 나라 빼앗긴 병을 치료하지 않고는 주민을 구휼(救恤)하는 일들은 모두 헛된 일이라 보고 나라를 찾기 위하여 많은 우국지사들과 교류하였다.

33인중의 한 분인 이갑성(李甲成)지사가 보낸 사람으로부터 3·1독립선언 시위 계획을 통보받은 기독교인 손종일(孫鐘一), 박순익(朴順益)지사는 칠원 유지들과 거사를 의논하였으나 대부분의 명망 높은 유지들은 칠원 향교에 출입하는 사람이므로 고종황제의 국상중(國喪中) 경거망동은 삼가는 것이 좋다는 의견이었다. 칠원은 옛날부터 현(縣)이 있었던 곳으로 칠원 향교(鄕校)를 중심으로 유림(儒林)의 세력이 강성하여 기독교인과 상민들만으로 의거를 일으키는 것은 무리가 있었다.

이 때문에 박순익(朴順益)지사는 밀양 박씨 가문의 원로이신 박경천(朴敬天)지사와 의논하였고 박경천(朴敬天)지사가 앞장서서 칠원의 대성(大姓)인 창원 황(黃)씨, 상주 주(周)씨, 영산 신(辛)씨와 김해 김(金)씨 중에서 동지를 규합하여 기독세력과 유림의 연대를 도모하였다. 하지만 시간이 많이 걸려서 함안에서 제일 늦게 의거 봉화가 올랐다. 그러나 함안읍과 군북 의거에 자극을 받은 주민들은 분기충천하여 4회에 걸쳐 궐기하였다.

칠원 장날 의거는 기독교 장로이며 지방 유지인 손종일(孫鐘一)지사와 각 家門의 대표격인 엄주신(嚴柱信), 박경천(朴敬天), 윤사문(尹士文), 박순익(朴順益), 김상률(金相律), 정영보(鄭泳普), 황대수(黃大秀), 주영호(周泳鎬), 신영경(辛泳慶), 윤형규(尹兄珪), 황영환(黃英煥)지사 등이 밀회를 거듭한 끝에 칠원 장날인 3월 23일에 거사하기로 하고 칠원면 용산리의 깊은 산중에 있는 가장정(佳藏亭)에서 독립선언문을 등사하고 태극기를 제작하였다.

독립선언서와 태극기를 제작하는데 필요한 문종이(韓紙)는 엄주신(嚴柱信)지사가 의령 신반에서 약봉지를 만든다는 핑계로 다량 구입 공급하였고, 태극기의 깃대는 용산에 흔히 있는 산대(山竹)를 이용하였다. 용산의 깊은 골짜기에 있는 가장정(佳藏亭)에서 태극기를 만들 때 동원된 십여 명 지사들의 세끼 식사는 용산리에 사는 윤형규(尹兄珪), 김상률(金相律), 신영경(辛泳慶), 황영환(黃英煥)지사들의 집에서 나누어 밥을 짓고 나뭇꾼을 가장하여 운반하였다.

3월 23일 오후 4시경 장터에 모인 1천여 명의 시위 군중에게 태극기를 나누어주고 독립선언식이 거행되었다. 손종일(孫鐘一)지사가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후에 대형 태극기를 앞세우고 작은 태극기를 들고 대한독립만세를 3창하니 그 함성은 약 3km 떨어진 작대산(爵大山, 해발 648m)에까지 메아리쳤고 군중은 市街 행진에 들어갔다. 시위 군중은 칠원 市街地를 행진하고 경찰관 주재소를 포위하여 포위망을 좁혀갔다. 마산 경찰서의 지원을 얻은 왜경은 사주경계(四周警戒)를 취하면서 총탄을 발사할 자세로 군중을 위협하였다. 일본도(日本刀)를 든 왜경(倭警)이 뛰어나와 선두에서 만세를 부르고 군중을 선동하던 황영환(黃英煥), 신영경(辛泳慶), 신영수(辛英秀)지사를 체포하였다. 이어서 착검한 총으로 군중을 위협하니 군중은 분노를 참고 해산하였다.

3월 19일 함안읍 의거와 3월20일 군북 장날 의거에서 혼비백산한 마산 경찰서장은 장날을 기해 칠원 경찰관 주재소의 왜경을 증원하여 비상경계를 펴고 있던 중이므로 진압 경찰의 출동은 비교적 빨랐다. 왜경은 착검한 총으로 시위 군중을 위협하고 격렬하게 독립만세를 외치면서 왜경의 저지선을 돌파하려는 신영경(辛泳慶), 황영환(黃英煥)지사를 오랏줄에 묶어 연행하였다. 형(兄) 신영경(辛泳慶)지사를 구출하려던 신영수(辛英秀)지사가 왜경의 총개머리 판에 일격을 당하고 혼절하니 무력한 시위 군중은 왜경의 총검 앞에 더 저항하지 못하고 해산하였다. 그날 밤 9시경에 3백여 명의 군중이 칠원 경찰관주재소에 몰려가 신영경(辛泳慶), 황영환(黃英煥), 신영수(辛英秀)지사의 석방을 요구하였으나 윤사문(尹士文)지사를 체포하고 총검으로 위협하며 해산을 종용하므로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제1차 의거에 이어 4월 3일 칠원 장날에 2차 의거가 일어났다. 1차 의거 때 보다 군중의 수는 3백여 명이 더 많은 1천 3백여 명이었다. 장날 오후 3시경 시장 한복판에서 미리 준비한 태극기를 장꾼에게 나누어주고 손종일(孫鐘一)지사가 선두에서 대형 태극기를 흔들면서 대한독립만세를 선창하고 엄주신(嚴柱信), 박경천(朴敬天), 윤형규(尹兄珪), 김상률(金相律), 정영보(鄭泳普), 황대수(黃大秀), 이원식(李元植), 주영호(周泳鎬)지사 등이 뒤따라 독립만세를 연호하니 시장에 모인 군중들이 목이 터져라 외치는 만세의 절규는 작대산에까지 메아리쳤다. 왜경은 파견된 군인의 지원을 받아 총검으로 시위 군중을 해산시키는 한편 황대수(黃大秀), 이원식(李元植)지사를 연행 구속하였고 해산하였다.

오후 5시 30분경에 다시 8백여 명의 군중이 분기하여 주재소를 포위하고 구속자의 석방을 요구하여 몽둥이와 투석으로 경찰과 맞섰으나 진해 경중포병대대의 군인이 출동하여 엄주신(嚴柱信), 손종일(孫鐘一), 박순익(朴順益), 박경천(朴敬天), 정영보(鄭泳普), 김상률(金相律), 윤형규(尹兄珪)지사가 체포되고, 그 후 많은 군중은 친일(親日) 칠원 면장 김○○의 집을 습격하여 봉변을 주다가 주영호(周泳鎬), 김두량(金斗良)지사가 체포된 후 해산하였다.

칠원 장날 의거는 경남독립운동소사와 함안 3·1 운동사 편찬 자료에는 4월 3일, 4월 8일, 4월 13일 3회에 걸쳐 시위가 있었다고 기술하고 있으나 경남 부산 3·1 운동사에는 3월 24일에 제1차 만세 시위가 있었다고 기술하고 있으므로 칠원 장날 의거는 4회에 걸쳐 일어났다고 본다. (註> 3·1운동사에 3월 24일 장날은 3월 23일이 잘못된 것으로 봄)

체포된 엄주신(嚴柱信)지사는 왜경의 혹독한 고문을 받은 후 1919년 5월 20일 부산지방법원 마산지청에서 징역 8월형을 언도받았으나 '내 나라를 찾기 위한 것이 어찌 죄가 될 수 있느냐'하면서 항소하였다. 그러나 1919년 6월 10일 대구복심법원 형사 1부에서 조선총독부 검사 노구찌(野口)가 간여한 심리에서 재판장은 '피고 엄주신(嚴柱信)은 조선 독립의 여망을 달성할 목적으로 원심 공동피고 손종일(孫鐘一)이 발의한 모의에 동참하여 원심 공동피고 박경천(朴敬天), 윤형규(尹兄珪) 등과 손잡고 구한국 대형 태극기를 들고 소형 태극기를 제작 준비하여 1919년 4월 3일 오후 3시경 전기 손종일(孫鐘一) 등과 7-8명이 칠원 장날 군중 안에 들어가 미리 계획된 순서에 따라 피고 엄주신(嚴柱信)으로 하여금 태극기를 군중에게 배포하고 손종일(孫鐘一) 등과 같이 대형 태극기를 높이 쳐들고 대한독립만세를 크게 선창하면서 읍내를 누볐다.' '그러므로 원판결은 지당한 것이므로 항소 이유는 없다.' '따라서 형사 소송법 제261조 제1항에 준하여 항소를 기각한다.' 대구 복심법원 형 제 558호의 판결로 刑이 확정된 엄주신(嚴柱信)지사는 대구 감옥에서 옥고를 치렀다.

그 외 칠원면 사무소의 범죄인 명부와 부산지방법원 마산지청의 형 집행원부에 수형사실이 있으나 판결문을 발견하지 못한 지사로는 징역 1년 형을 받은 손종일(孫鐘一)지사, 징역 8월의 선고를 받은 박순익(朴順益), 김상률(金相律), 정영보(鄭泳普)지사, 징역 8월에 집행유예 2년을 언도받은 박경천(朴敬天), 윤형규(尹兄珪)지사, 징역 6월의 옥고를 치른 이원식(李元植), 주영호(周泳鎬), 신영경(辛泳慶), 신영수(辛英秀), 황영환(黃英煥)지사가 있다. 또한 함안 3·1독립운동사 편찬자료에서 칠북 연계 장터 의거 지사 명단에 거명된 윤사문(尹士文), 김두량(金斗良)지사도 칠원 의거에서 체포되어 징역 6월형을 언도받았다.

엄주신(嚴柱信)지사는 형기를 마치고 석방 후 칠서면 무릉에서 韓醫師로 주민에게 많은 봉사를 하였으나 왜경의 탄압이 극심하여 1940년 칠원면으로 이사하여 한의원을 경영하다가 1973년 8월 28일에 영면하시니 향년 83세이다.

정부에서는 공훈을 기리어 1992년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다.
후손(後孫)으로는 아들 영환(永煥), 문섭(文燮), 무섭(武燮)과 여섯 명의 딸이 있으며 손자로는 동규(東奎), 영규(英奎)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