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가

애국지사 엄주신

행동하는 지도자 엄주신 장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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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동하는 지도자 엄주신 장로

엄주신 장로. 임명남 여사

엄주신 장로. 임명남 여사 회혼례

칠원교회 2대 장로로 초대 손종일 장로와 함께 일제 암흑기의 칠원교회를 잘 이끌었으며, 장남 영환 씨와 장손인 동규 씨까지 장로가 되어 3대에 걸쳐 장로 가문을 이끌어낸 엄 씨 집안 믿음의 조상이기도 한 엄주신 장로는 1890년 4월 15일 함안군 칠원면 구성리에서 출생 하였고 1909년 칠서면 무릉리 출신 임명남 씨와 결혼 후 분가하여 칠서면 무릉리 274번지에서 살았다.

어려서부터 학문에 전념하여 장래가 촉망하다는 중평을 받았으나 조선말기 매관매직이 성행함을 보고 이를 통탄히 여겨 성리학(性理學)을 접고 실사구시(實事求是)하는 실학으로 옮겨 어른들로부터 호된 꾸지람을 듣기도 하였다. 그러나 성리학의 공리공론으로는 나라를 되찾고 백성을 구휼하는데 미흡하다고 판단한 그는 한의학(韓醫學)에 정진, 존경받는 한의사로 변신하였는데 용하다는 소문이 전국은 물론 일본에까지 알려져 일본에서도 약을 지어가기도 하였다.

1910년 12월 17일 위철치 목사에게서 학습을 받았으며 1913년 3월 5일 남행리 목사에게서 세례를 받았다. 1918년 12월 26일 집사로 선임되어 교회를 섬겼고 1919년 2월 19일에는 영수로 선임되어 교회를 섬겼으며 1933년 1월 26일 장로로 장립 받아 칠원교회의 지도자가 되었다.

1931년부터 1946년까지 16년간을 장년주일학교 부장과 교장으로 수고를 하였으며 1931년부터 1936년까지 6년간은 유년주일학교에서도 부장과 교장을 맡는 등 가르치는 일에 열심을 다하였다.

1919년 3월 독립만세운동 때에는 손종일 장로와 박순익 영수 박경천 성도 등과 함께 칠원지역의 만세운동을 앞에서 주도하다 일경에 체포돼 징역8월의 옥고를 치렀다.

평생을 한의사로서 한의원을 경영하며 주민에게 많은 봉사를 하면서 살았고, 1973년 8월 28일 부산시 명륜동 자택에서 자손들이 모인 가운데 찬송가를 듣는 중에 하늘나라로 갔다.

02

명의(名醫)로서의 엄주신 장로

엄주신 장로는 당시 삼칠지역(칠원·칠서·칠북)과 서부 경남에서 몇 안 되는 유명한 명의였다. 의술도 의술이지만 칠원교회의 집사가 된 후 부터는 의술과 함께 믿지 않는 이에게 복음도 함께 전하는 영육간의 의원 노릇을 하였다. 일제의 수탈로 먹을 양식조차 없어서 아파도 의원을 찾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는 소문을 들으면 직접 찾아가 치료해 주고는 약값은 나중에 벌어서 갚으라며 돈을 받지 않고 치료를 하고 약을 지어주어 주위 사람들의 칭송을 받았다.

엄 장로의 손자로 지금은 목사가 된 엄영규 씨가 중학교에 다니던 60년대 초의 일이었다. 영규 군이 할아버지 옆에서 한약 재료를 썰고 있는데 한 남자가 아이를 데리고 들어오는데 아이의 눈이 반쯤 밖에 뜨지 못한 상태였다. 엄 장로가 진맥을 한 후 약 반재(10첩)를 지어주면서 “이 약을 재탕까지 해서 다 달여 먹이면 아이의 눈이 완전히 뜨일 것이니 안심하고 돌아가서 약을 먹이고 교회에도 나가시오”라고 하였다. 환자가 돌아간 후 엄 장로는 손자 영규에게 “저분은 멀리 통영에서 오신 분인데 지난 장날에 아이를 데리고 왔을 때는 눈이 완전히 감긴 상태였단다. 아이 아버지가 전국의 유명한 병원에 가서 치료를 받았고 심지어 일본에까지 갔는데 백약이 무효가 되자 소문을 듣고 여기까지 오게 된 것”이라면서, 아이의 눈이 감기게 된 원인에 대해서 설명을 하는데 “그것은 아이의 내장에 좋지 못한 열이 생겨서 그 기원이 눈을 치고 올라왔기 때문이다. 현대의학의 맹점이 국소에서만 원인을 찾고 치료를 하기 때문으로 근본 원인을 젖혀두고 국소만 치료를 하니 치료가 될 리가 없다. 근본 원인인 내장의 나쁜 열과 기운을 다스려야 아이의 눈이 뜨이게 되는 것”이라고 하였다. 몇 달 후 영규 군이 방학을 맞아 칠원에 내려가서 이야기를 들은즉, 정말로 그 이아가 눈을 완전히 떴고 감사하여 교회도 다니며 명절 때 인사까지 왔었다는 것이었다.

엄 장로는 또한 십일조 함을 만들어 약국에 비치하고 많든지 적든지 이익이 나든지 손해가 되든지 새 돈을 골라 수입에서 십분의 일은 반드시 십일조 함에 넣고는 자녀들에게 이 모습을 보여 주었다고 했다.

03

철저한 신앙인 엄주신 장로

엄주신 장로는 장남인 엄영환 장로 외에도 아들인 문섭과 무섭, 딸들로 계순 정순 효순 묘순 영주 계주 등 9명이나 되는 자녀를 두었다. 엄 장로는 교회에 나가면서부터 하루도 빼놓지 않고 새벽기도를 드린 후 곧이어 이른 아침에 가정예배를 드렸는데 자녀들을 모두 깨워서 함께 예배를 드렸다. 자녀들을 어려서부터 믿음 안에서 키우기 위해서였다. 기도와 말씀으로 진행되는 가정예배에서는 아이들까지 순서를 정해서 기도와 성경을 읽도록 하였다. 또 농사일을 하는 일꾼들에게 일을 시킬 때에도 반드시 가정예배가 끝난 후부터 시작토록 하였다.

주일성수 또한 엄 장로가 목숨처럼 지켰는데, 주일예배를 반드시 자기 교회에서 드리도록 하였다. 아무리 먼 곳으로 출장을 나가도 반드시 토요일 오후까지는 집으로 돌아왔고 혹 외지에 나가있는 자녀들이 토요일에 전화로 집에 오겠다고 하여도 자기 교회에서 예배를 드린 후에 오라고 해서 자녀들이 몹시 섭섭해 하였다.

무릉리에서 교회까지는 먼 거리였음에도 칠원교회에 새벽기도회가 생긴 후부터 한 번도 빠진 적이 없었고, 1923년 새 교회당 건축공사가 시작되면서부터는 먼 길을 걸어서 건축현장에 나가 감독을 하였고, 1925년 4월 20일 입당예배를 드리게 하였다. 1923년 새 교회당 건축 당시 엄 장로의 역할이 대단히 중요했는데, 당시 성전건축과 관련하여 이런 일화가 있다.

당시 교회당 건축과 관련하여 가장 문제가 원자재인 목재를 구하는 일이었다. 왜냐하면 당시 건물은 우리나라 전통의 목조(木造) 건물이었고 그래서 목재(木材)가 가장 중심적인 자재였다. 교회당 건축이 시작될 당시는 일제가 우리나라에 산림법을 공포하고 한국 내 임산자원을 송두리째 앗아가던 시절로 심지어 나무뿌리까지 뽑아갈 정도였다. 따라서 재목(材木)으로 쓸 나무를 구하는 일이 무척이나 어려웠다.

그런데 여호와이레의 우리 하나님께서 칠원교회를 사랑하셔서 이렇게 중요한 목재를 이미 오래 전부터 예비해 두신 것이다. 당시 무릉리에서 한의원을 경영하던 엄주신 영수가 밭이랑에 버드나무를 심어두었는데 어느새 자라서 아름드리 재목이 되어있었던 것이다. 40주를 베어다가 다듬었더니 모두 기둥이 되어 훌륭한 성전 재목이 되었다.

장정들이 목두를 해서 어깨에 메고 신작로까지 운반한 다음 우차(牛車)에 실어 교회로 옮겼다. 당시 칠원에는 제재소가 없어서 그 큰 나무들을 손도끼로 찍어서 각을 내고 다듬어 용도에 따라 요긴하게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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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대째 믿음의 가정 계승시킨 믿음의 아버지

엄주신 장로 가족

엄 장로는 체구가 크고 힘이 쎌분더러 신앙에 관한한 절대 양보가 없었다. 한번은 깊은 밤에 칠원읍에서 무릉리로 돌아오는데 산길에서 호랑이를 만났다. 그러나 엄 장로는 당황하지 않고 침착하게 서서 호랑이의눈을 뚫어져라 주시했는데 한참 후 호랑이가 슬그머니 꼬리를 내리고 자취를 감쳤다는 일화가 구술로 전해진다(손자 엄동규 장로가 할아버지인 엄주신 장로로부터 직접 들었다고 한다).

1937년 일제가 칠원보통학교 정문 옆에다 신사를 지어놓고 신사참배를 강행하연서 관민은 물론 학생들에게까지도 강행을 했는데, 이 학교 4학년에 재학 중인 엄 장로의 두 아들인 문섭·무섭 형제가 손종일 장로의 손자인 동인 군과 함께 적극적으로 거부를 하였다. 평소 가정예배를 통하여 어른들이 가르쳐준 대로 아이들이 학교에서 실행을 한 것이다.

화가 난 교장이 경찰서장과 함께 엄 장로를 불러다놓고 “더 이상 거부하면 퇴학을 시키겠다고 호통을 쳤다. 그러나 엄 장로는 “퇴학을 맞더라고 우상 앞에 절하라고 시킬 수는 없습니다.”라고 하였고 그 결과 아이들은 퇴학을 맞고 말았다.

이런 엄 장로인지라 해방 후 출옥성도들을 중심으로 교회재건운동을 할 때 출옥성도들과 듯을 같이하였고 그 결과 칠원교회가 고려측 교회가 되는데 중심적인 역할을 담당하였다. 그리고 당시 친일파 교권 주의자들에 의해 총회가 고려신학교와 경남노회(법통)를 축출하기로 결정하자 고려측 대표로 고별선언을 한 것이 총회록에 기록되어 있다.

1952년 4월 29일 대구서문교회당에서 열린 제37회 장로회총회(총회장 김재석)에서 있었던 사실로 총회가 급조된 경남노회를 인정하고 기존의 경남(법통)노회에 대해 “고려신학교와 그 관계자들(경남법통노회)은 총회와 하등의 관계가 없다.”는 결정을 내림으로 고려측 경남노회를 총회에서 축출한 것이다. 이에 엄주신 장로가 고려 측 경남(법통)노회 대표로 단상으로 나가 총회와 고별선언을 하였고, 이 일을 끝으로 고려신학교를 중심한 경남노회(법통)는, 친일 배교행위를 하고도 회개할 줄 모르는 장로회총회와 결별, 장로회 고려측이란 새 역사를 시작하게 되었다.

엄 장로는 또한 가르치는 일에도 은사가 있어 1931년부터 1946년까지 16년간을 장년주일학교에서, 그리고 6년간을 유년주일학교에서 각각 부장과 교장, 교사 등을 맡아 수고를 많이 하였다.

한의사로서 한의원을 경영하며 주민들을 위한 봉사도 많이 하던 그는 노년에는 장남인 엄영환 장로와 함께 부산으로 옮겨가 살다가 1973년 8월 28일 부산시 동래구 명륜동 자택에서 자손들이 모인 가운데 찬송가를 들으며 소천(召天)했다. 마지막 순간까지 환하게 웃으면서 하늘을 향해 두 손을 펴고 “천사들이 나를 데리러 온다.” 면서 둘러앉은 자손들에게 찬송가를 부르라고 한 후 웃음 띤 얼굴로 찬송가를 듣는 중에 하늘나라로 간 것이다.

이러한 엄 장로의 신앙은 후손들에 이어져 현재 5대손까지 믿음을 계승하고 있는데. 장남인 엄영환 씨는 칠원교회에서 장로장립을 받아 대를 이어 충성하다가 부산으로 갔고, 6명의 딸과 사위들은 모두가 권사와 장로 직분을 받아 각자 처한 위치에서 충성을 다하고 있다. 손자들 중에도 장손인 동규 씨가 3대 장로로 대를 이어 교회를 섬기고 있고, 영규 씨는 목사로, 그리고 장손인 동규 씨의 장남 준용 씨도 목사가 되어 교회를 섬기고 있다.

[칠원교회 100년사에서 옮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