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봉관 KAIST 디지털인문사회과학부 교수
6·25 때 전국 발칵 뒤집은 국민방위군 부정 스캔들

일러스트=한상엽
6·25전쟁 개전 초기 인민군은 남한 점령지역에서 20여만명의 청년을 의용군으로 강제 징집했다. 1950년 10월 국군과 유엔군이 압록강까지 밀고 올라갔던 전세가 중공군의 참전으로 역전되면서, 대한민국 정부는 미래의 병력 자원인 청년들을 후방의 안전지대로 후송할 대책을 강구했다.
10월 20일 정부는 ‘국민방위군(이하 방위군) 설치안’을 국회에 제출하고, 이등병 경험조차 없었던 청년방위대 대장 김윤근을 육군 준장으로 임관시켜 방위군 사령관으로 임명했다. 청년방위대는 1950년 3월 대한청년단을 기반으로 창설된 준군사조직이었고, 대한청년단은 여순 사건 직후 우익 청년단체를 통합해 결성된 관변 단체였다. 대한청년단 총재는 이승만 대통령이었고, 방위군 설치 당시 국방부 장관이었던 신성모가 초대 단장을 역임했다.
방위군 사령관 김윤근은 씨름 선수로 이름을 날리다가 해방 후 청년운동에 뛰어든 인물이었다. 6척 거구에 유도 5단이었고, ‘주흥을 즐기는 호탕한 남아’였다. 대한청년단 감찰국장, 청년방위대 대장으로 활약하면서 이승만 대통령과 신성모 국방부 장관의 두터운 신임을 받았다.
17세 이상 40세 이하 남자의 지원을 받아 제2국민병으로 편입하는 ‘방위군 설치법’은 1·4후퇴를 보름여 앞둔 1950년 12월 16일에야 국회를 통과했다. 방위군 지휘부는 대부분 김윤근 사령관처럼 군대 경험이 전무했던 청년방위대 간부들로 채워졌다. 방위군 소집 영장을 받은 청년들은 전쟁 초기 공산 치하에서 겪었던 고초를 기억하고 ‘정부가 보호해 주는 피란’ 정도로 이해하고 소집에 응했다.
방위군에 부여된 첫 번째 임무는 전국에서 제2국민병을 모집해 제주도, 경상남·북도에 설치된 49개 교육대로 후송하는 것이었다. 방위군은 쌀 한 톨, 군복 한 벌도 지원받지 못한 채 후송 작전을 개시했다. 방위군 예산은 후송이 마무리된 1951년 1월 말에야 국회를 통과했다. 인솔자들은 ‘착지(着地) 부산 구포’식의 막연한 명령서를 들고 수천 장정을 후송했다.

1951년 1월 8일 대구 부근 교육대를 향해 행군하는 국민방위군. 엄동설한에 방한복과 식량조차 배급받지 못한 채 수백 km를 걸어서 이동했다. /국사편찬위원회
한복과 식량도 제대로 배급받지 못한 수천 장정이 2열 종대로 줄을 지어 행군하는 행렬은 흡사 거대한 거지 떼처럼 보였다. 동상·기아·질병으로 희생자가 속출해 ‘죽음의 대열’, ‘해골의 행진’이라 불렸다. 기간병은 제2국민병의 탈영을 막을 능력도 의지도 없었다. 출발 당시 68만여명이었던 장정들 가운데 후방의 교육대에 도착한 인원은 그 절반에도 못 미치는 30여만명에 불과했다.
교육대에 입소해서도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다. 대부분 국민학교 교사에 설치됐던 교육대는 20평 교실에 120명씩 쑤셔 넣어 2명에 1개씩 거적을 지급하고는 엄동설한에 맨바닥에서 취침하게 했다. 주먹밥에 소금국으로 연명하던 장정들은 허기가 져 훈련도 제대로 받지 못했다. 일부 소대장은 마을 주민들에게 밥을 얻어오는 요령을 가르치기도 했다. 말이 교육대지 수용소와 다름없었다.
방위군의 참상은 창설된 지 한 달도 되기 전인 1951년 1월 15일 국회에서 처음 제기됐다. 3월 말 논란 끝에 ‘방위군 의혹 사건 국회특별조사위원회’가 출범했다. 헌병사령부 수사에서는 방위군 지휘부가 병력 수를 허위로 부풀려 예산을 청구하고, 예산을 미리 공제해 하급 부대에 지급하는 등 심각한 부정행위가 드러났다. 수사과장 윤우경 중령은 이승만 대통령에게 “방위군을 그대로 두면 대통령께 누가 될 것”이라 직언하고, “염려 말고 수사하라”는 대통령의 승인을 얻었다. 그러나 신성모 국방부 장관은 대통령의 지시도 무시한 채 헌병사령부에 수사를 확대하지 말라는 압력을 넣었다. 결국 군검찰은 사령관 김윤근은 ‘기소각하’(현 공소 취소)하고, 부사령관 윤익헌을 비롯한 간부 16명만 기소했다. 5월 6일 중앙고등군법회의는 윤익헌에게 징역 3년 6개월을 선고했다. 국민의 공분을 가라앉히기에는 지나치게 가벼운 형량이었다.
부사령관 선에서 ‘꼬리 자르기’ 하려던 신성모의 계획은 도리어 광범위한 국민적 저항을 불러일으켰다. 국회는 재심을 요구하는 결의문을 채택하고, 이승만 대통령을 항의 방문했다. 결국 선고 이튿날인 5월 7일 신성모의 후임으로 국방부 장관에 취임한 이기붕은 방위군 사건 재수사와 김윤근의 구속을 지시했다. 방위군은 창설된 지 6개월도 되기 전인 5월 17일 폐지됐다.
헌병사령부 재수사 결과 방위군에 지급된 138억원의 예산 중 현금 25억여원과 양곡 1800여 가마가 부정 처분된 사실이 드러났다. 방위군 장정들이 얼어 죽고 굶어 죽어나가는 동안, 김윤근을 비롯한 지휘부는 밤마다 정부 고관, 국회의원, 군 수뇌부 등을 요정으로 초대해 술판을 벌였다. 국회의원 30명에게 1억3000만여원의 ‘공작비’를 제공하고, 고위 장교 12명에게 840만원 상당의 순금 군번표를 제작해 상납한 사실도 공개됐다.
7월 5일 재심 공판이 개정했다. 변호인단이 일사부재리 원칙을 들어 재심은 부당하다고 이의를 제기했지만, 재판부는 기소 내용과 적용법이 달라질 때는 재심이 가능하다는 이유에서 공판을 진행했다. 군검사는 ‘춘향전’의 한시를 변용해 논고를 마무리했다. “금 술잔에 담긴 좋은 술은 방위병의 피요(金樽美酒民兵血)/ 옥쟁반에 차려진 훌륭한 안주는 장정들의 기름이라(玉盤佳肴壯丁膏)/ 예산 항목이 흘러갈 때 병사들의 눈물도 흐르고(項目流時兵淚流)/ 웃음소리가 높아지는 곳에 곡소리도 높아진다(笑聲高處哭聲高)”
7월 19일, 재판장 심언봉 준장은 김윤근 사령관을 비롯한 방위군 간부 5명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김윤근은 “나는 행정도 정치도 모르는 씨름꾼인데 어쩌다 중책을 맡아 일을 저질렀다. 사형을 받고서야 큰 감투는 아무나 쓸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뒤늦게 후회했다. 8월 13일, 정부는 김윤근의 국외 도피설 등 국민적 의혹을 불식시키기 위해 500여명의 군중이 지켜보는 가운데 김윤근을 비롯한 방위군 간부 5명을 공개 총살했다.
국방부는 1234명의 방위군이 사망했다고 공식 발표했지만, 5만여명이 사망했다는 언론보도도 있었다. 횡령금의 정치권 유입과 고위층 관여 의혹은 더 이상 규명되지 않았다. 국민방위군 사건은 무능하고 부패한 대통령 측근 탓에 수만 명 청년이 죽어나간 불행한 사건이었지만, 대한민국에서 국회의 정부 견제 기능이 살아 있음을 보여주는 사건이기도 했다.
<참고 문헌>
부산일보사 편, 『비화 임시수도 천일』, 1984
동아일보사 편, 『비화 제1공화국』, 홍자출판사, 1975
유영익·이채진 편, 『한국과 6·25전쟁』, 연세대출판부, 2002
중앙일보사 편, 『민족의 증언』 4, 중앙일보사, 1983
진실화해위원회, 『2010년 상반기 조사보고서』 제10권, 2010
출처: 조선일보((2026.10.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