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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과 손맛[살며 생각하며]

  • 관리자
  • 26.10.26
  • 6

김병종 화가, 서울대 명예교수

 

라틴어 ‘호모 파베르’란 말은 생존 위해 도구 쓰는 것을 지칭

요즘엔 기계 만능시대가 되니 그 옛날 손맛이 점점 그리워져

늙어가며 창작의 열정 솟는 건 내게 아직도 ‘設來臨’ 있기 때문

 

“음식은 손맛이야!”

 

옛날에 어머니는 부엌 쪽에 대고 이렇게 말씀하시곤 했다. 요새 작업을 하다 말고 가끔 혼자서 중얼거린다. “그림도 손맛이야!”

 

바야흐로 세상은 현기증 나게 돌아간다. 내 살아생전 과연 또 어떤 기상천외한 문명이 펼쳐질지 상상하는 것마저 어렵다. 뭔가 어깨를 툭 쳐서 돌아보면 벌써 까마득한 과거가 되어 있고 새로운 미래는 코앞에 다가와 있다. 미처 배우고 학습할 시간마저 주어지지 않는다. 한쪽에서는 역사에서 경험하지 못했던 기술 유토피아의 신기원이 열릴 거라 하고, 다른 한쪽에서는 그 끝에 인류 문명의 디스토피아가 기다리고 있을 거라는 불길한 예언을 한다. 그 희망의 유토피아와 절망의 디스토피아 사이에 끼인 세대인 나는 대략 난감하다.

 

요즘 들어 부쩍 골방 냄새가 나는 작업실에 들어서면 수십 년씩 사용해 듬성듬성 털이 빠져나간 늙은 붓들을 애잔한 마음으로 물끄러미 바라보곤 하는 때가 많다.

 

옛 선비들은 말년이면 평생을 반려처럼 함께해 온 붓들을 모아 필총(筆塚·붓 무덤)을 만들어주었다 했고, 무사들 또한 자신의 죽음을 예감하면 스스로 수의를 장만하면서 동시에 도총(刀塚·칼 무덤)을 만들어 주었다고 한다. 붓이나 칼이나 그 쓰임새는 달라도 한 사람의 생애 동안 주인의 손과 시간을 함께했다는 점에서는 다르지 않은 것이다. 나도 언젠가 내 생애의 종장(終章)이 오기 전에 평생을 함께한 붓들의 무덤부터 만들어 주어야 할지 모르겠다.

 

미술 동네에서는 한때 “아직도 그리세요” 하는 말이 유행한 적이 있다. 그만큼 재료와 방법이 현란하게 달라지면서 재래적 의미의 그림 그리기가 퇴조해 버렸다는 의미였을 것이다. 어쨌거나 나는 번쩍번쩍 흘러가는 이 변화무쌍한 시간 속에서 아직도 그린다. 가장 낡은 재료와 가장 오래된 방법으로 그리고, 그 일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그림은 본디 그 의미가 그리움의 완결체라 하는데, 적어도 그림을 그리는 동안에는 그리움도 계속될 것이고, 그리움과 설렘이 있는 한 나의 시간 또한 생명의 맥박으로 뛸 것이기 때문이다.

 

어렸을 적에는 온 천지가 생명의 충만함으로 흐드러져 있었다. 그 속에서 자란 나는 새들의 노랫소리를 듣고, 피어오르는 아지랑이와 멀리 구름처럼 둥둥 떠가는 송홧가루들을 볼 수 있었다. 논마다 벼 외에도 생명의 양식거리들이 풍성했다. 논의 우렁이와 게와 미꾸라지 그리고 메뚜기들, 강에는 붕어와 피라미와 작은 새우들이 어머니나 누이들의 손을 거쳐 밥상에 오르곤 했다. 어쩌면, 내가 새로운 문명에의 환승에 매번 어려워했던 것도 이처럼 나의 기억과 감성을 흔들고 지나갔던 어린 시절의 시각과 미각 체험들 때문이 아닌가 싶다.

 김병종 ‘화홍’.

김병종 ‘화홍’.

 

라틴어로는 인간을 호모 파베르(Homo Faber)라고 한단다. ‘공작인(工作人)’, 즉 생존과 생계 유지를 위해 도구를 만들고 그 도구를 사용해서 일하며 먹고살도록 되어 있는 것이 인간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도구를 만들되 일하지 않는 것을 이상적 경지로 생각하게 된 것 같다. 그 결과, 사람의 손은 그 역할을 잃어 가고 끝내는 손가락 끝의 최소한의 움직임만으로 노동을 줄이는 단계에까지 이른 것이다. 무엇이든 극단으로 가면 그 반대를 갈망하게 된다. 기계 만능의 시대로 가면서 손맛이 그리워지는 것도 그 때문이다. 그래서 음식도 손으로 직접 만들었음을 강조하게 되었을 것이다. 손만두, 손칼국수, 수제버거, 수타면, 심지어 수제 초콜릿까지….

 

일을 하다가 가끔씩 방배동의 한 자리를 수십 년씩 지키며 늙어가는 구두 수선집 영감님을 생각하곤 한다. 굳은살이 박여 능숙하게 구두 깁는 실을 당기는 그 망아의 경지를 물끄러미 본 적이 있는데, 장자는 이를 신기료장수 아닌 포정(포丁)이라는 소 잡는 칼쟁이 사내에 빗대어 ‘해우(解牛)’라는 표현으로 명명했다. 얼마나 망아의 경지에서 한바탕 칼춤 추듯 소를 도살했으면 그런 표현을 썼을까 싶다.

 

신기료장수나 포정이나 나나 서로 쓰는 도구가 다를 뿐 시간을 녹여서 하는 행위라는 점에서는 같은 게 아닐까? 장자는 기예가 어느 경지에 오르면 도가 된다고 했다. 즉, 도라고 하는 것은 실체 없이 막연하고 몽롱한 것이 아니고 오랜 몸 기술의 연마 끝에 터득된다는 말이다. 그런 면에서 동양의 모든 예술 재료가 그림이건 춤이건 음악이건 서예건 손의 훈련을 일정 시간 이상 거쳐야 함을 이해하게 된다. 예컨대, 예술에 있어 먼저 손의 기교로 그 맛을 내는 것이 중요하다는 뜻이다. 이 지점에서 동양의 예술은 표현 재료가 같은 인문학과의 접점을 이룬다. 나이 들수록, 단지 오래 했다는 것을 넘어 내 손으로 좋은 것을, 아름다운 것을 만들고 싶다는 소박한 생각을 하게 된다.

 

요즘에는 생의 전반부를 너무 많이 허비하고 말았다는 생각 때문에 후반부에는 그 벌충으로라도 손을 더 부지런하고 노련하게 몰고 가야 한다는 다짐을 하게 된다. 다행히 내 팔과 팔뚝, 손의 힘은 큰 붓, 작은 붓을 아직 장검과 단검처럼 마음대로 쓸 수 있음에 감사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창작의 원료가 되는 ‘설레임’(설렘)이 있음에 또한 감사한다. 나를 지금까지 몰아 왔던 그 설렘 그분이, 그날이 은총처럼 내게 임할 것 같은 그 설(設) 래(來) 임(臨)이.

 

출처: 문화일보(2026-1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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