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찬용 칼럼니스트
“우리 이제 말 놓을 때 되지 않았어요?” 같은 흐름의 말이 오갈 때가 있다. 보통 이런 경우는 사회에서 몇 년 봤고 나이도 비슷하고 말도 잘 통하고 앞으로도 오래 볼 것 같은 사람과 있을 때 나오는 말이다. 이때 상대가 말 편하게 하자는 신호를 보낸다면 감사한 호의다. 나는 그래서 더 무안하게 답한다. “죄송합니다. 제가 어른이 되고 만난 사람과는 말을 안 놓아서요.”
내게도 이유는 있다. 20대 시절 가끔 대뜸 말을 놓는 사람들이 있었다. “이제부터 (자신을 가리켜) ‘형’이라고 할게” (갑자기) “말 편하게 할게” 같은 식으로. 말을 편하게 하는 건 상관없는데 내 경험상 그런 사람들이 문제가 있는 경우가 좀 있었다. 보자마자 상하를 정해 두고 본인이 위에 있겠다는 느낌이 들어 유쾌하지 않기도 했고. 그때 다짐했다. 나는 나이가 들었다고 어려 보이는 사람에게 말을 놓지 말아야지. 그래서 나는 말을 놓지 않는 어른이 되었다.
내 직업과 업계의 업황도 내 언어생활에 영향을 미쳤다. 에디터 일을 하면 새로 만나는 사람이 많다. 업황도 들쭉날쭉해서 나는 이직도 꽤 했다. 그러다 보니 누구에게 말을 놓고 누구에게 말을 놓지 않을지가 애매해졌다. 선후배가 확실하고 늘 만나는 사람을 만나는 직장이나 직군이라면 개인의 언어 습관이 달라질 것 같다. 선배면 존대, 동기나 후배면 반말 같은 식으로. 나는 그렇지 않으니 ‘사회에서 만난 사람이라면 모두 존대를 하자’라는 원칙이 마음 편해졌다.
내가 예의 바르고 정중하다는 게 아니다. 되레 장난 잘 치고 경박한 편이다. 입에서 반말 형태의 한국어를 내지 않을 뿐이다. 다만 이런 시간이 쌓이자 고향을 떠난 사투리 사용자처럼 반말을 하는 게 어색해졌다. 오랜만에 학창 시절 친구들을 만나면 말을 놓기가 어려울 정도다. 한번은 내가 반말을 하는 지인을 세어 봤다. 친동생이나 아직 연락이 닿는 친구들 등을 다 쳐도 10명 남짓 같다.
다만 젊은 분들을 생각하면 조금 다른 걱정이 든다. 놀랍게도 여전히 일부 젊은이들은 말을 편하게 하는 연장자들을 편안해하는 것 같다. “말 편하게 하세요”라는 말을 하는 젊은 분들이 아직 많다. 물론 그 말을 어디까지 다 믿어야 할지도 모르겠지만. 결과적으로 나는 쓰던 존대를 계속하고 있다. 사회에서 만난 사람들끼리 최소한의 거리가 있는 게 좋다는 게 내 의견이긴 하다. 그걸 매너라 해도 좋고 쾌적함을 위한 심리적 거리라 해도 좋다.
그러다 인공지능(AI) 시대가 왔다. 대화형 AI가 일상의 일부가 됐다. 나는 AI에게도 질문을 존대로 입력하고 대화도 존대로 나눈다. 그런데 AI가 반말을 할 때가 있다. 나는 AI에게 묻는다. ‘왜 반말을 하세요?’ 친절한 AI는 내가 궁금한 건 말해주지 않고 정중한 사과만 한다. ‘불편을 드려 죄송합니다. 그러지 않겠습니다.’ AI에게 ‘또 반말하셨네요. 한국어 존대 설정이 어려운 건가 봐요’ 같은 말을 입력하면서 여러 생각을 하곤 한다. 존댓말은 어려운 거구나. 예나 지금이나. 사람에게나 AI에게나. 이제 AI는 존댓말을 잘해 주지만 언제 또 어떻게 될지 모른다. 뭐든 맹신은 좋지 않다.
출처: 동아일보(2026-10-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