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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50대 신입사원의 재취업 첫날[정경아의 퇴직생활백서]

  • 관리자
  • 26.10.19
  • 20

정경아 작가·전 대기업 임원

 일러스트레이션 권기령 기자 beanoil@donga.com

일러스트레이션 권기령 기자

 

절친했던 동료에게 연락이 왔다. 궁금했었는데 그가 먼저 자신의 근황을 전했다. 그는 올 초에 퇴직했다고 했다. 구직활동을 이어오다가 다행히 작은 회사에 들어가게 됐다며 자신에게 해 줄 말은 없는지를 물었다. 잠시 고민하다 내 상황을 떠올렸다.

 

나는 최근에 재취업을 했다. 직원이라고 해 봐야 대표를 포함해 총 세 명인 회사다. 지인의 소개로 얻은 몇 개월짜리 자리였지만 내겐 참으로 특별했다. 정해진 시간에 향할 곳이 있다는 사실 자체가 커다란 활력이 됐다. 한평생 직장에서 일해 온 터라 큰 걱정은 하지 않았다.

 

그런데 첫날부터 당황스럽기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대표의 일정으로 오전에는 사수와 둘만 있게 됐는데 분위기가 왠지 묘했다. 그는 30대 중반으로 내게 업무 지시를 할 사람이었다. 사수는 내가 불편했는지 짧은 인사를 마친 뒤로 내내 업무에만 집중했다. 나도 잠자코 있다 보니 어색한 침묵만 길게 이어졌다. 그래도 그때까지는 괜찮았다.

 

오후 회의를 앞두고 사수가 메신저로 파일을 보내며 출력해 오라고 했다. 순간 속으로 생각했다. 내가 직접 해야 한다고? 아무렇지 않은 척 노트북에 USB메모리를 꽂았지만, 설정부터 막혔다. 프린터에 종이를 어느 방향으로 넣는지도 헷갈렸다. 보다 못한 사수가 도와준 덕에 간신히 뽑긴 했으나 돌아서자 방금 본 순서가 가물거렸다. 다음에 혼자 못 하면 어쩌나 덜컥 겁이 났다.

 

본격적으로 회의가 열리자 머릿속이 하얘지기 시작했다. 대표와 사수가 주고받는 대화를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낯선 용어들이 별다른 설명 없이 오고 갔다. 아는 단어가 나와도 앞뒤 맥락을 모르니 흐름을 따라가기가 어려웠다. 이제 곧 사수가 하라는 일을 처리해야 할 텐데 도통 감이 잡히지 않았다. 제대로 일을 해 보기 전에 분위기 파악부터 막힐 줄은 몰랐다.

 

아니나 다를까 사수는 회의 후에 공용문서를 확인하라고 했다. 틀을 만들어 뒀으니 필요한 사항을 추가하라고 했다. 일단 알겠다고 대답하고 겨우 찾긴 했는데 작성 방법에서 막히고 말았다. 바로 쓰면 되는 건지, 다운받아 수정해야 하는 건지 알 길이 없었다. 한참 뒤 사수는 바뀐 내용이 보이지 않는다고 했다. 몇 시간의 작업이 허사가 된 것이다.

 

별수 없이 처음부터 다시 해야 했다. 사무실에는 어느새 나 혼자만 남아 있었다. 점심 먹은 것이 얹힌 듯 속이 더부룩했다. 종일 앉아 있었는데도 먼 길 다녀온 듯 피곤했다. 아침에는 출근할 곳이 생겨 기뻤는데 저녁에는 이 일을 계속할 수 있을지 걱정이 됐다. 뒤늦게 문밖을 나서니 하늘은 별 하나 없이 컴컴했다.

 

문득 주변에서 했던 말이 머리를 스쳤다. 다시 일하려면 모든 걸 내려놓아야 한다는 얘기였다. 눈높이를 낮춰야 하고, 나이나 지난 과거를 앞세워서도 안 된다고 했다. 나 역시 그런 준비는 마쳤다고 자신했다. 직함을 따지지도 않았고, 아쉬운 처우도 기꺼이 감수했다. 그런데도 하루가 버거웠던 것은 왜일까. 단지 일이 낯설어서만은 아닌 것 같았다.

 

내게는 여전히 붙들고 있는 한 가지가 있었다. 그것은 오래 일한 사람은 달라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나는 수십 년을 일했으니 이 회사에서도 웬만한 업무는 너끈히 해내야 한다고 여겼다. 전과 다른 조건은 받아들였어도 능숙하게 보이고 싶은 마음은 내려놓지 못했다. 젊은 사수에게 지시받는 것은 괜찮았지만, 쩔쩔매는 모습은 들키기 싫었다. 그래서 이해하지 못한 부분이 있어도 슬쩍 넘겼고, 내가 맞게 하고 있는지도 묻지 않았다. 새 직장에서도 한때 인정받았던 시절의 나를 지키려 하였다.

 

그래서 작은 실수도 가볍게 넘기기 어려웠다. 프린터 앞에서 막히면 기계치가 된 듯해 창피했고, 회의를 따라가지 못하면 말귀도 못 알아듣는 사람이 된 것 같아 괴로웠다. 낯선 곳에서 헤맨 하루가 온통 내 능력에 대한 성적표처럼 느껴졌다. 처음이라 서툰 게 당연한데도, 나는 오랜 경력자라면 무조건 잘해야 한다고 나 자신을 채근했다.

 

그런 마음이다 보니 도움을 청하는 것조차 흠처럼 여겨졌다. 덕분에 물어보면 금세 끝났을 일을 종일토록 붙들었고, 심신이 완전히 지쳐 버렸다. 나는 작은 회사에서 일할 각오는 했을지 몰라도 작은 일부터 다시 배우는 사람이 될 준비는 돼 있지 않았다. 능숙하게 보이는 데 신경을 쓰느라, 정작 능숙해지는 데 필요한 질문은 꺼내지 않았던 셈이다.

 

흔히 퇴직자의 재취업이 힘들다고들 한다. 어렵게 자리를 구하고도 얼마 못 가 그만뒀다는 이야기도 심심찮게 들린다. 혹여 일자리를 얻는 데에만 집중하고 새로운 조직에서 다시 시작하기 위한 고민은 미뤄뒀기 때문은 아닐까. 만약 취업을 생각한다면 어떤 일을 할 수 있을지만큼이나 무엇을 배워야 하는지도 살펴보셨으면 좋겠다. 성공적인 재취업은 출근하는 첫날이 아니라, 그곳에서 자신의 자리를 만들어 가는 데 있으니 말이다.

 

출처: 동아일보(2026-1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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