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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시절, 좋은 지도자들

  • 관리자
  • 26.1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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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주말] [김황식의 풍경이 있는 세상]

 

 김황식 전 국무총리

 일러스트=유현호

일러스트=유현호

 

1985년 3월에 54세의 미하일 고르바초프가 소련 최고 지도자로 선출됐습니다. 그는 ‘새로운 사고(思考)’를 내세우며 ‘페레스트로이카’와 ‘글라스노스트’, 즉 ‘개혁’과 ‘개방’을 주창했습니다. 이른바 ‘민주주의적 공산주의’를 주장한 것입니다. 그것은 폴란드 철학자 레셰크 코와코프스키가 사용한 표현에 따르면 ‘구워진 눈덩이’와 같은 것이었습니다. 과연 고르바초프가 눈덩이를 구울 수 있을까? 큰 의문이었습니다. 그는 비정통적인 방식의 협상 제안과 매력적인 공격으로 서방 측을 부드럽게 압박했습니다. 많은 서방 측 지도자들이 당황했습니다. 독일 헬무트 콜 총리는 고르바초프를 일단 선전술의 귀재로 보았습니다. 미심쩍어하면서도 큰 틀의 역사적 화해를 생각했습니다. 콜 총리는 한 인터뷰에서 나치의 괴벨스도 선전술의 대가였다고 언급했습니다. 물론 비보도를 전제로 한 언급이었지만 언론이 참을 리 없었습니다. 그대로 보도했습니다. 언론과의 대화는 어느 경우라도 공개될 것을 생각해야 하는데, 콜 총리의 실수였습니다. 불쾌한 크렘린은 1987년 1월 독일 총선 결과가 나올 때까지 콜 총리와의 접촉을 중단했습니다. 총선으로 다시 콜 총리가 집권하자 비로소 두 사람은 과거는 잊고 본격적인 대화를 시작했습니다.

 

1989년 6월 고르바초프는 서독을 방문하여 콜 총리와 회담했습니다. 마지막 날 두 사람은 회담을 마친 후 정원을 산책하다가 자정이 넘은 시간에 통역만을 대동하고 라인강가로 내려가 강가 성벽에 걸터앉아 흐르는 강물을 바라보면서 가족·고향·인생에 대하여 이야기를 나누고, 유럽 국가들이 서로 두려워하지 않고 함께 살아가는 세상을 만들어야 한다는 데 공감했습니다. 성벽 아래 산책을 나온 젊은이들이 고르바초프를 알아보고는 깜짝 놀라 인사를 하고 농담까지 주고받았습니다. 외교 형식을 떠난 인간적 교감이었습니다.

 

고르바초프의 개혁 개방 정책에 가장 적극적으로 호응한 나라는 헝가리였습니다. 1989년 5월2일 헝가리 정부는 오스트리아로 넘어가는 국경의 차단 시설을 제거함으로써, 동독 주민의 탈출 통로가 생겼습니다. 그러나 헝가리 정부는 동구권 국가들로부터 통로를 폐쇄하라는 압박을 받았습니다. 헝가리 네메트 총리가 비밀리에 서독을 방문하여 콜 총리와 회담한 뒤 동독 난민을 위한 국경의 계속적 개방을 다짐했습니다. 콜 총리가 고마운 나머지 어떠한 대가를 원하는지 묻자, 네메트 총리는 “헝가리는 사람을 놓고 장사하지는 않습니다”라고 답변했습니다. 콜 총리는 네메트 총리와의 회담 내용을 고르바초프에게 솔직하게 알려줍니다. 콜 총리는 고르바초프의 반응이 두렵기도 하고 궁금했습니다. 민감한 문제였기 때문입니다. 고르바초프의 대답은 “헝가리인들, 좋은 사람들입니다”였습니다. 콜 총리는 안도했습니다.

 

독일 통일 과정에서 최대 걸림돌은 통일 독일의 군사동맹 문제였습니다. 고르바초프는 처음에는 통일 자체를 반대하였으나 마지막에는 독일 통일을 수용했습니다. 그러나 통일된 독일이 서방의 군사동맹 즉 나토(NATO·북대서양조약기구) 회원국으로 남는 것은 한사코 반대했습니다. 콜 총리는 한 나라의 자주적 의사 결정권이 대내 문제와 대외 문제에서 구분될 수 없는 것이라며 나토 가입국이 될 것을 강력히 주장했습니다.

 

마침내 1990년 7월 모스크바에서 최후의 담판을 벌였습니다. 소련은 여전히 독일의 나토 가입을 반대하고, 콜 총리는 완전한 주권 행사가 아니라며 이에 항의하며 당장 독일로 돌아가겠다고 으름장을 놓았습니다. 고르바초프는 자기 고향 지역인 코카서스의 맑은 공기 속에서 더 논의하자고 권유하여 함께 코카서스로 날아갔습니다. 결국, 독일의 나토 가입을 용인하되, 독일군 병력은 37만명으로 제한하고 핵무기와 생화학무기는 생산·보유·활용하지 않으며 나토군은 구동독 지역에는 주둔하지 않기로 약속했습니다. 현재의 국제 정치 상황에서 보면, 동화 같은 이야기입니다.

 

외교 관계도 그 기본은 인간관계입니다. 신뢰와 호양(互讓)을 바탕으로 자존심과 품위를 지키면서 상호 이익을 도모하는 것이 외교의 본령이라 할 것인데, 지금은 이와는 거리가 먼 지도자가 너무 많습니다. 시대의 비극입니다.

 

출처: 조선일보(2026.1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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