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현미 논설위원

그리스 신화에서 영웅 헤라클레스는 자신의 죄를 씻기 위해 열두 과업을 수행한다. 그중 열 번째가 붉은 섬 에리테이아에 사는 괴물 게리온의 소 떼를 훔쳐 왕에게 가져오는 일이다. 신화 속 영웅들이 그렇듯 그는 게리온을 죽이고 숱한 고난 끝에 과업을 완수해낸다. 그에게 괴물은 그저 쓰러뜨려야 할 대상일 뿐이다.
하지만 올해 노벨 문학상 수상 작가 앤 카슨은 대표작 ‘빨강의 자서전’(1998)에서 이 신화를 영웅 헤라클레스가 아니라 그의 화살에 죽은 게리온의 입장으로 다시 썼다. 수상 발표 후 베스트셀러가 된 이 작품에서 게리온은 붉은 몸과 날개를 가진 현대의 소년으로 되살아나 어린 시절의 학대, 소년으로 등장한 헤라클레스와의 사랑과 이별을 겪으며 글과 사진으로 자기 삶을 기록해 나간다. 영웅에 가려졌던 존재가 자기 이야기의 주인공이 된 것이다. 스웨덴 한림원은 카슨의 작품에 대해 ‘고전 전통과 유희적 대화를 나누며 현대문학의 새로운 형식을 만들어 낸 대담하고 독창적인 세계’라고 평했다.
고전은 시대마다 늘 새롭게 읽히고 다시 쓰인다. 오늘의 질문 앞에 불려 나오는 것이야말로 고전의 생명력이다. 이를 증명하는 가장 최근의 예라면 크리스토퍼 놀런 감독의 영화 ‘오디세이’를 꼽을 수 있다. 하지만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아’를 전혀 다른 시선에서 풀어낸 작품들이 있다. 마거릿 애트우드의 ‘페넬로피아드’(2005)는 오디세우스의 부인 페넬로페와 그가 귀환한 뒤 교수형을 당한 열두 하녀에게 목소리를 부여했고, 매들린 밀러의 ‘키르케’(2018)는 오디세우스가 귀환 길에 만난 마녀를 자기 삶의 주인공으로 세운다. 앞서 동독 출신 작가 크리스타 볼프는 ‘메데이아’(1996)를 통해 신화 속 대표 악녀로 꼽히는 메데이아를 권력다툼의 희생양이 된 이방인으로 그려내기도 했다. 이들은 카슨의 게리온과 함께 영웅의 승리 아래 지워지고 숨겨진 이들의 이야기를 통해 지금, 우리 삶을 비춰낸다.
문학은 이렇게 기존 세계에 균열을 내 그 틈에서 새로운 시선과 상상력을 끌어올린다. 요약과 생성이 순식간에 이뤄지고 매끈하게 정리된 답이 넘치는 인공지능(AI) 시대에, 우리가 깊게 읽어야 하는 이유이다. 앤 카슨의 노벨상 수상은 그 가치를 다시 일깨운다.
출처: 문화일보(2026-10-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