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드레스 솔라노 콜롬비아 출신·소설가

지난 추석 연휴 아침, 나는 영화 ‘파멸’(1988년)을 보기 위해 영화관으로 향했다. 2025년 노벨 문학상 수상자인 헝가리 작가 크러스너호르커이 라슬로가 각본을 쓰고 헝가리 거장 터르 벨러가 연출한 작품이다. 이미 두어 번 봤지만 배경음악과 어우러진 10분 가까운 롱테이크를 다시 보고 싶었다. 영화라는 매체를 예술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게 만드는 장면들이다.
날짜와 시간대, 감독의 성향을 생각하면 관객이 거의 없을 줄 알았다. 터르는 폐허 같은 표정의 인물들이 빗속과 진흙탕을 헤매고 허름한 술집에서 취하는 비관적인 흑백영화를 만들었다. 과묵한 남녀들은 비가 내리는 황량한 도로를 하염없이 걷고, 금방이라도 무너질 듯한 건물에 산다. 허름한 동네 술집에서 술에 취한다.
솔직히 나는 내가 유일한 관객일 수도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놀랍게도 상영관은 반쯤 차 있었다. 고독한 영화광뿐 아니라 커플과 젊은이 무리도 눈에 띄었다.
몇 주 전 서점에서도 비슷한 놀라움을 겪었다. 신간 매대마다 한국어로 번역된 크러스너호르커이의 소설이 맨 앞줄을 차지하고 있었다. 그가 노벨 문학상을 받은 지 1년이 지났으니 단순히 수상 소식 덕에 진열된 건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짐작할 수 있는 이유는 단 하나뿐이었다. 마침표나 문단 나누기조차 거의 없이 500쪽 넘게 이어지는 까다로운 소설을 읽는 한국 독자가 있다는 뜻이리라. 공산주의 붕괴 직전 헝가리의 황폐한 현실을 미친 듯한 리듬으로 밀어붙이는 문장 속에서 제국주의 과거에 대한 씁쓸한 향수를 관통하면서도 동시에 어둡고 기이한 재미를 발견한 독자들일 것이다.
크러스너호르커이는 내 독서 인생에서도 비교적 최근에 발견한 작가다. 그의 작품에서 받은 충격은 그의 오랜 친구이자 공동작업자인 터르의 영화를 처음 봤을 때와 닮았다. 터르는 2011년 ‘토리노의 말’을 끝으로 영화계에서 은퇴했고, 올해 1월 세상을 떠날 때까지 살아 있는 전설로 불렸다.
그의 최고 걸작은 단연 ‘사탄탱고’(1994년)다. 몰락해 가는 집단농장의 사람들을 다룬 영화로 크러스너호르커이의 동명 소설이 원작이다. 내가 그의 소설 중 가장 좋아하는 작품이지만 영화는 아직 보지 못했다. 상영 시간이 무려 7시간 19분인 데다 171개의 테이크로만 구성돼 있다. 각 테이크의 길이는 짧게는 2분에서 길게는 10분에 이른다. 보통 10초 남짓마다 화면이 바뀌는 상업영화와는 시간의 감각부터 다르다. 터르가 얼마나 모험을 감행했는지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그런데 한국인들은 크러스너호르커이의 책을 읽고 터르의 작품 몇 편을 보는 데 그치지 않았다. 바로 이 ‘사탄탱고’를 보려고 극장으로 몰려갔다. 관객은 5000명을 넘어섰고, 상당수가 젊은층이었다. 터르 자신도 놀랄 만한 수치다.
의심 많은 성격 탓인지 처음에는 인터넷에서 이따금 유행하는 ‘챌린지’ 같은 것인가 싶었다. 상영관을 나서는 관객들에게 ‘사탄탱고를 끝까지 다 본 사람’이라고 적힌 배지를 나눠준다는 점도 그런 의심을 부추겼다. 하지만 그런 생각은 곧 사라졌다. 극장에 앉아 두 번의 인터미션을 거치며 ‘사탄탱고’의 7시간을 버텨내는 행동 자체가, 값싼 도파민을 좇는 방식과 정반대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왜 이렇게 많은 관객이 모여든 것일까. 콜롬비아 영화감독이자 평론가인 헤로니모 아테오르투아의 책 ‘다가올 영화들’에서 해답을 찾을 수 있었다. 지난 20년간 영화의 새로운 길을 개척한 감독들과의 인터뷰를 묶은 책이다. 저자는 터르가 사라예보에 세운 영화학교 ‘필름 팩토리’에서 공부했다. 학교는 오래가지 못했지만 그곳에서 시작된 꿈은 인터뷰에 참여한 여러 감독의 작품 속에 살아남았다.
1980년대 중반 헝가리 정부가 터르에 대한 제작 지원을 끊었을 때가 있었다. 그는 그 시기 일본의 한 영화제에 초청돼 전통극 ‘노(能)’를 봤다. 한 인물이 무려 50분 동안 무대를 가로질렀다. 서구의 서사 패러다임으로 보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시간이었지만, 그 안에서는 수백 가지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터르는 줄거리는 이해하지 못했으나 훨씬 깊고 다르게 흐르는 시간을 경험했다. 그 감각을 품고 헝가리로 돌아와 만든 영화가 ‘파멸’이었다.
5000명이 넘는 한국 관객도 ‘사탄탱고’의 7시간을 온몸으로 겪어냈다. 그중 상당수는 인생의 절반을 스마트폰과 함께 살아온 젊은이들이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지 모른다는 불안과 위험을 감수하면서 시간의 다른 흐름을 느끼려 한 것이다. 나는 이들의 선택에서 진심으로 희망을 느낀다.
출처: 동아일보(2026-10-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