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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궁인의 심야 일지] "약 끊어야 수술" "약 끊으면 위험" 의료 핑퐁의 덫

  • 관리자
  • 26.10.11
  • 5

남궁인 이대 목동병원 응급의학과 교수·작가

 

할머니는 배가 아프다고 했다. 중년의 아들이 휠체어를 밀고 함께 응급실에 방문했다. 우리는 일단 환자를 침대로 안내했다. 할머니는 먹기만 하면 자꾸 배가 아파서 음식을 안 먹게 된다고 했다. 환자는 우리 병원 진료 기록은 없었고 복부 검진상 별다른 이상이 없었다. 그런데 갑자기 아들이 어머니가 요즘 밑이 빠진다는 말씀을 하셨다고 덧붙였다. 복통과 연관이 있을 것 같았다.

 

“편찮으신 곳을 봐드릴게요. 저희 간호사와 같이 진찰하겠습니다.”

 

할머니는 바지춤을 조심스럽게 끌어내리는 내 손을 순간적으로 붙들었다. 순간 할머니의 정신이 온전치 않은가 생각했다. 하지만 착각이었다.

 

“저, 목욕을 안 해서, 부끄러워요.”

 

병원에서 마주하는 아흔 살의 인지 능력은 스펙트럼이 아주 넓다. 뇌졸중이나 파킨슨처럼 인지 기능을 떨어뜨리는 질환이 있고 나이가 올라갈수록 치매 발병률도 높아진다. 하지만 젊은 사람과 똑같은 인지 능력을 유지하는 노인도 많다.

 

“괜찮습니다. 여기는 병원이고 저는 의사입니다. 환부를 직접 확인해야 도와드릴 수 있습니다. 마음 편히 맡겨주세요.”

 

할머니는 이내 신체 검진에 협조해 주었다. 하의를 내리자 뒤집힌 모양으로 길게 빠져나온 자궁이 보였다. 자궁탈출증이었다. 자궁을 지탱하는 인대가 느슨해져 자궁이 질 밖으로 밀려 나오는 병이다. 초기에는 스스로 들어가기도 하지만 말기에는 탈출한 상태에서 복원되지 않는다. 환자는 자궁이 탈출한 지 이미 오랜 시간이 지나 외과적 수술이 필요해 보였고, 복통과 감염 등 합병증에 시달렸을 게 분명했다. 무엇보다 보기만 해도 고통스러워 보였다.

 

그 자리의 의료진은 내심 비슷한 생각을 했다. 할머니가 어쩌다 방치되었을까. 의식이 온전한 분이어서 무리 없이 수술을 받을 수 있었을 텐데. 아들도 우리의 미묘한 분위기를 눈치챈 듯했다. 진찰을 마치고 자리로 돌아가려는데 아들이 따로 나를 붙들었다.

 

“저희 어머니가 보시다시피 수줍음이 많으십니다. 많이 불편하셨을 텐데도 저희한테 한동안 말씀을 안 하시고 참으셨어요.”

 

충분히 그럴 수 있었다. 하지만 마음 한구석에서 의구심이 남아 있었다.

 

“사실, 작년쯤 제가 알아채고 산부인과에 모시고 갔었습니다. 그쪽에서는 수술하자고 했어요. 그런데 어머니가 뇌혈전 위험 때문에 와파린을 드시거든요. 산부인과에서는 와파린을 끊고 와야 수술해 준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신경외과에 갔더니 잠시도 와파린을 끊으면 안 된다고 하더군요. 한쪽에서는 수술하려면 약을 끊으라 하고 한쪽에서는 약을 끊으면 큰일 난다고 하고, 결국 이도 저도 못하고 있었습니다. 어머니는 부끄럽다고 더 말씀 안 하셨고요. 그러다가 배가 아프다고 하셨는데, 답답해서 다니던 병원이 아니라 이쪽으로 왔습니다.”

 

나는 어떻게든 여기서는 수술을 받으실 수 있게 조율해 보겠다고 답하고 돌아왔다. 산부인과의 입장은 이해가 갔다. 와파린은 수술의 절대 금기다. 신경외과의 입장도 틀리지는 않았다. 와파린은 고위험 환자에게 처방하는 약이라 중단하면 혈전의 위험이 컸다. 만약 뇌졸중이 생긴다면 중단을 권고한 의사의 책임이지만 자궁탈출증은 당장 생명을 위협하는 병은 아니었다. 하지만 단순한 문제도 아니었다. 누구도 잘못하지 않았지만 고통과 수치를 견뎌내야 하는 것은 결국 환자였다. 그러니까 방치는 보호자가 하지 않았다. 막상 방치는 우리 의료인들이 하고 있었던 것이다.

 

출처: 조선일보(2026.1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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