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인열 기자

일러스트=박상훈
1977년 3월 서울 여의도 목화아파트 분양에서 한 복부인이 시동생 등 주변 사람 이름을 빌려 100건의 청약을 넣었다. 잠실의 한 아파트는 입주 전 주인이 15번 바뀌기도 했다. 정부는 그해 8월 무주택자에게 국민주택을 우선공급하는 청약제도를 만들고, 이듬해 민간 아파트에도 적용했다. 무주택자를 골라 돈 대신 순서대로 줄을 세우는 것이 우리 청약 통장의 출발이었다.
▶세계적으로 드문 청약 통장 제도는 고도성장기 한국 경제의 숨은 엔진이었다. 집 지을 돈이 부족했던 국가는 국민이 매달 붓는 쌈짓돈을 모아 주택 건설 자금으로 썼고, 정부는 당첨자에게 시세 차익을 안겨줬다. 가난한 나라가 국민의 저축과 기다림을 밑천 삼아 아파트를 지어 올린 셈이다. 취직하고 결혼하면 통장부터 만들던 시절이었다. 십여 년을 꼬박꼬박 부어 분당과 일산 신도시에 입성하는 건 흙수저가 중산층에 이르는 공식이었다. 한때 가입자가 국민 절반을 넘는 2800만 남짓이었다.
▶2007년 가점제 도입 때부터 삐걱대기 시작했다. 그전까지 민영 아파트는 수도권의 경우 통장 가입 후 2년이 지나 1순위 자격만 갖추면 대부분 추첨으로 당첨자를 가렸다. 가점제는 무주택 기간과 부양가족 수, 가입 기간을 합쳐 점수를 매겼다. 오래 기다린 사람을 우대하자는 취지였지만 젊은 세대엔 ‘가까이 하기엔 너무 먼 당신’이었다. 편법도 속출했다. 올 초 지명 철회된 한 장관 후보자는 결혼한 장남을 혼인 신고 전이라며 부양가족에 올려 분양가 37억원짜리 강남 ‘로또 아파트’를 거머쥐었다. 무주택 서민을 위한 점수표가 부자들의 재테크 경연장이 된 꼴이다.
▶요즘은 점수보다 돈이 더 문제다. 올 8월 서울에서 분양된 전용 59㎡ 아파트 평균 분양가는 16억원에 육박한다. 주택담보대출 최대한도는 6억원이다. 당첨돼도 현금 10억원 없으면 잔금 치를 길이 없다. 올 들어 8월까지 2030 세대가 해지한 청약통장은 75만 좌다. 신규 통장보다 8만 좌 많다. 7년 부은 통장을 깬 30대는 “앞으로 월급의 3분의 1을 주식에 넣겠다”고 했다.
▶청약통장은 가난한 나라가 국민의 인내를 담보로 집을 짓고 훗날 그 인내를 보상했던 약속이었다. 오늘 푼돈을 아끼면 내일은 번듯한 내 집이 생길 거란 믿음이 ‘한강의 기적’을 떠받친 중산층의 역동성이었다. 그 약속이 깨진 지금, 젊은이들은 ‘한 방’을 좇으며 각자도생하고 있다. 한때 보통 사람들의 희망 보증서였던 그 묵직한 통장이 시대의 뒤안길로 사라지는 풍경이 씁쓸하다.
출처: 조선일보(2026.10.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