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훈 논설위원
영화 '암살자(들)' 음모론 펴지만 육 여사 저격의 배후인 조총련을
고향 방문단으로 초청한 박정희 이게 우리가 기억할 진짜 역사

1975년 9월 추석 성묘를 위해 고국에 돌아온 조총련계 재일동포들을 위한 환영식이 국립극장에서 열렸다. /KTV 캡처
1948년 건국 이후 오늘에 이르는 대한민국 역사를 세상은 기적이라고 한다. 경제도 정치도 기적의 역사다. 그중엔 1975년 9월 추석을 맞아 조총련계 재일동포 700여 명이 광복 후 처음으로 고향을 방문한 사건도 포함된다. 그 방문을 기점으로 그때까지 조총련에 장악된 80만 재일동포 사회가 반(反)대한민국에서 친(親)대한민국으로 돌아섰다. 변화의 첫 단추를 꿴 이가 다른 사람도 아닌 방문 행사 1년 전 재일동포 청년 문세광이 쏜 흉탄에 영부인 육영수 여사를 잃은 박정희 대통령이었다.
1974년 8·15 경축식이 열린 국립극장에서 아내를 잃은 박 대통령은 조총련이란 말만 나와도 치를 떨었다. 일본에 사죄를 요구하는 외교 사절로 최영철 의원(훗날 통일부 장관)을 보낼 때는 최 의원을 붙잡고 눈물까지 흘렸다. 최 의원은 “박 대통령의 눈물을 본 것은 그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고 했다. 당시 껄끄러운 정적이자 야당 당수였던 김영삼 의원을 청와대로 초청한 자리에서도 “내자(內子·육 여사)가 없으니 절간에 있는 것 같다”며 손수건을 꺼내 눈가를 훔쳤다. 아들 박지만씨 앞에서는 통곡을 했다.
그런 박 대통령에게 당시 중앙정보부 국장이던 김영광 전 의원이 청와대 모임 자리에서 “조총련의 고향 방문 사업을 해보시라”고 제안했다. 문세광을 꼬드겨 아내를 죽게 한 가해자 집단을 초대하자는 제안에 박 대통령은 눈에 역겨운 빛이 돌고 손을 부르르 떨 정도로 분노했다. 모임 분위기가 차갑게 얼어붙었다. 김 국장은 대통령의 노여움을 샀으니 사표를 쓰겠구나 하며 후회했다고 한다. 그런데 1주일 뒤 청와대에서 ‘세부 계획을 짜서 보고하라’는 지시가 떨어졌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고 했던가. 원한을 되갚고 싶은 이들의 심정을 표현한 말이다. 박 대통령도 인간적으로는 그러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나라의 명운을 두 어깨에 짊어진 이의 복수는 결코 사사로울 수 없었다. 원수를 초대하기로 결단한 심정을 박 대통령은 이렇게 표현했다. “근혜도 반대했지만 내가 대통령이기에 결심했어.”(김충식 지음 ‘남산의 부장들’)

김희갑이 부른 노래 '불효자는 웁니다'를 들으며 눈물을 훔치는 재일교포들./KTV 캡처
이듬해 9월 24일 박 대통령이 육 여사를 잃은 비극의 현장이던 국립극장에서 재일동포 고향 방문단 환영식이 열렸다. 축하 공연을 위해 단상에 오른 희극배우 김희갑이 노래 ‘불효자는 웁니다’를 불렀다. “불러봐도 울어봐도 못 오실 어머님을~.” 노래가 울려 퍼지자 객석의 재일동포들은 오열했다. 방문단은 쇳물을 쏟아내는 포항제철과 수십만t 크기 유조선을 만드는 울산 현대조선소도 견학했다. 고국 방문의 여파는 컸다. 이듬해부터 해마다 추석과 설이면 조총련 계열 동포가 수천 명씩 고국을 찾았다. 육 여사 묘소도 찾아 헌화하고 참배했다. 귀화하지 않고 조선 국적을 고집하던 이들이 대한민국으로 국적을 바꾸며 조총련은 급속히 와해됐다. 전성기 50만명에 육박하던 거대 조직이 2만명 규모로 쪼그라들었다. 또 다른 문세광이 나올래야 나올 수 없는 분위기로 재일동포 사회가 재편됐다.
재일동포 고향 방문 첫 행사로부터 반세기가 흐른 지난 추석, 육 여사 저격을 소재로 만든 영화 ‘암살자(들)’을 보며 참담한 심정을 금할 수 없었다. 영화는 청와대 경호실과 중정이 육 여사 저격을 합작했다는 음모론을 폈고, 두 권력 기관을 움직인 배후로 박 대통령을 의심케 하는 여러 정황을 나열했다. 그러나 그것은 반세기 전 그날의 진짜 역사가 아니다. 박정희는 아내의 죽음을 부른 ‘배후(들)’을 초대해 끊어진 핏줄을 이어주고 잊힌 고향을 되찾아 줬다. ‘위대한 복수’라는 말로밖에 표현할 수 없는 이 역사가 우리가 기억해야 할 영화 밖의 진실이다.
출처: 조선일보(2026.10.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