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수웅 논설위원

일러스트=이철원
여자 육상 최초로 아시안 게임 금메달을 따낸 선수가 투포환의 백옥자다. 1974년 테헤란에서 대회 2연패를 달성한 뒤, 그녀는 말했다. “이 금메달로 고국에 계신 국민 여러분께 작은 기쁨을 드릴 수 있다면, 지금 죽어도 여한이 없습니다.” 같은 해 WBA 밴텀급 세계 챔피언을 따낸 홍수환은 어머니의 응답이 더 유명해졌다. “엄마, 나 챔피언 먹었어”라는 아들 목소리에, 전화 너머 고국의 어머니는 외쳤다. “그래! 대한국민 만세다.”
▶반세기 전 가난했던 시절, 아버지·할아버지의 ‘라떼(나 때) 이야기’ 아니냐고? 2020 도쿄 올림픽에서 양궁 2관왕에 오른 김제덕은 첫 금메달을 땄을 때 태극기를 향해 거수경례를 올렸다. 기자들이 ‘병역 혜택’ 소감을 묻자, 당시 고교 2년생은 이렇게 대답했다. “그건 깊게 생각해보지 않았습니다. 그보다 태극기를 가장 높은 곳에 올릴 수 있어서 기쁘고 영광스럽습니다.”
▶이번에 논란이 된 아시안게임 남자 축구 대표팀의 선수 3명은 모두 그때의 김제덕보다 나이가 많다. 결승전에서 일본을 꺾고 4연패를 달성했다는 국민들 기쁨은 곧 씁쓸함으로 바뀌었다. 이들의 인터뷰가 철없는 병역 면제의 자랑판으로 변했기 때문이다. “군 면제라는 보상 하나만 보고 뛰었다”는 아슬아슬한 고백이 나오더니, “저, 군대 안 갑니다!”라는 환호성이 터져나왔다. 급기야 관중석에서 던져준 예비군 전역모를 쓰고 경례 포즈를 취한 사진까지 소셜미디어에 도배됐다.
▶금메달을 따면 병역 특례를 준다. 제도 자체를 없애라는 비판이 거세지만, 아직까지는 그렇다. 하지만 그 특례는 승자가 챙겨 가는 전리품이 아니라, 청춘을 바쳐 국방 의무를 수행 중인 또래 청년들의 양해와 배려로 마련된 특권이다. 현역 입영 통지서를 들고 입대를 기다리거나 연병장에서 구르고 있을 20대 청년들이 이 장면을 보면서 느꼈을 허탈감을 굳이 설명할 필요가 있을까.
▶국가 대표의 품격은 억지로 쥐어짠 엄숙함이 아니라, 내 언행이 타인에게 미칠 영향력을 가늠하는 최소한의 공감 능력에서 나온다. 가슴의 태극 마크는 혜택을 챙기기 위한 공짜 티켓이 아니다. 지금 이 ‘철없는 국가대표’들에게 필요한 것은 예비군 전역모가 아니라, 스스로의 말을 되돌아보는 성숙함이다. 2008년 베이징 올림픽 남자 수영 400m에서 금메달을 땄을 때, 막 고등학교를 졸업한 박태환은 말했다. “한국 수영도 세계 정상에 오를 수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대한민국 사람이라는게 자랑스럽습니다.”
출처: 조선일보(2026.10.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