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훈 논설위원

일러스트 이철원
이름을 존귀하게 여기는 문화는 동서양 모두 일찌감치 시작됐다. 서양 윤리 규범의 원형이라 할 십계명부터 ‘하느님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마라’고 했다. 동양에선 피휘(避諱) 문화로 나타났다. ‘왕이나 성인·조상의 이름을 함부로 쓰지 않고 피한다’는 뜻이다. 이름 대신 호나 자로 서로를 부르고 부모 이름을 말할 때 “홍, 길자 동자이십니다”라 하는 예법도 넓은 의미의 피휘다.
▶근대 이전 피휘가 가장 엄격하게 적용된 곳이 왕실이다. 부르봉 왕조 폐지 혁명 이전 프랑스에선 왕가를 제외한 어느 누구도 부르봉을 이름으로 쓰지 못하게 법으로 금했다. 공화파가 루이16세를 단두대에 보내며 왕명인 ‘루이 드 부르봉’을 ‘루이 카페’로 바꾼 것도 신성한 이름으로 여겨졌던 부르봉을 쓰는 이를 처형하기 부담스러웠기 때문이었다.
▶조선 왕실도 왕과 같은 이름을 쓰지 못하게 했지만 백성의 불편을 줄이는 배려도 잊지 않았다. 왕손의 이름을 지을 때 어려운 한자를 골랐다. 세종의 이름은 일반인은 거의 안 쓰는 도(裪)였다. 신분을 과시하려 해서가 아니라 일상에서 자주 쓰는 한자를 쓰지 않음으로써 백성이 피휘하는 데 따른 수고를 덜어주려는 의도였다. 신분제가 타파된 현대에 피휘는 사실상 자취를 감췄다. 다만 북한과 중국은 예외다. 북한에선 백두혈통인 김일성·김정일·김정은 이름을 국민은 쓸 수 없고 이미 쓰고 있으면 개명해야 한다. 중국에선 국가원수와 이름이 같은 국민에게 개명을 요구하지는 않지만 상호로 쓰는 것은 금지한다.
▶경기도에서 ‘시진핑’이란 간판을 달고 영업해 온 중식당에 4명이 추석 연휴를 틈타 침입해 내부 집기와 간판을 훼손하고 사라졌다. 반중 감정을 가진 내국인 소행인가 했는데 뜻밖에도 중국의 피휘 규정을 강요하려 한 중국인들 소행이란 증거가 나왔다. 지난해 봄부터 “중국 국가 원수의 이름을 식당 간판으로 쓰지 말라”는 압박 전화가 계속 걸려왔는데 거절하자 이번 일이 벌어졌다는 것이다.
▶피해를 본 식당은 한국의 상호와 간판 관련 법규를 준수했다. 그런데 중국인들이 폭력까지 써가며 자기들 규정을 강제하고 돈을 줄 테니 간판을 내리라고 회유했다고 한다. 주권 침해 아니냐는 격앙된 반응이 나오는 이유다. 서양에선 아브라함·알렉산더 같은 위인이나 집안의 귀감이 되는 어른과 부모 이름을 따라 자녀 이름을 짓는 전통이 있다. 이웃 나라 업소의 간판까지 훼손하는 건 그들이 지키겠다는 지도자와 국가 위신을 국제적 웃음거리로 만드는 시대착오일 뿐이다.
출처: 조선일보(2026.09.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