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일천 전 국가정보원 국장
출처 스파이박물관

1978년 불가리아 반체제 언론인 게오르기 마르코프 암살에 사용된 것으로 알려진 독극물 발사 우산총. 출처 스파이박물관
얼마 전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이란발 암살 위협 첩보 때문에 전용기에서 다른 군용기로 몰래 갈아탄 데 이어, 그의 막내아들 배런을 겨냥한 암살 위협 영상이 이란 국영방송을 통해 방영됐다. 적국 지도자나 주요 인사 등 특정인을 노리는 정보기관의 암살 공작은 큰 파장을 불러올 수 있는 불법 비밀공작이다. 전통적으로 이를 가장 적극적으로 실행해 온 국가 중 하나가 러시아다.
러시아는 옛 소련 시절부터 체제에 걸림돌이 되는 인물이나 서방으로 망명한 반체제 인사 등을 대상으로 암살 공작을 벌여 왔다. 그 과정에서 다양한 암살 장비도 개발했다. 1950년대 후반 소련 국가보안위원회(KGB)는 우크라이나 반체제 인사 레우 레베트와 스테판 반데라를 암살했다. KGB 요원 보흐단 스타신스키는 심장마비로 위장하기 위해 특수 제작된 청산가스 스프레이 총을 사용했다. 그는 자신에게 피해가 미칠까 봐 해독제까지 복용했다.
암살 도구로 ‘우산총’이 이용된 적도 있다. 표적은 1969년 영국으로 망명한 불가리아의 반체제 언론인 게오르기 마르코프였다. 그는 망명 후 방송인으로 활동하며 소련 체제를 지속적으로 비판했다. 1978년 영국 런던의 한 버스 정류장에 있던 마르코프가 갑자기 다리에 통증을 느낀 순간, 뒤에 있던 남성이 우산을 주우며 사과한 뒤 사라졌다. 당시에는 별다른 증세가 없었지만 그는 이튿날부터 고열에 시달리다 나흘 만에 숨졌다. 부검 결과 그의 몸에서는 설탕으로 코팅된 미세한 금속 알갱이가 나왔는데, 그 속에서 독극물 리신이 검출됐다. 암살은 불가리아 정보기관이 실행하고 KGB가 장비와 기술을 지원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 사건 이후 스파이 세계에서는 이런 우산총을 ‘불가리아 우산’이라고 부른다.
전직 러시아 연방보안국(FSB) 요원 알렉산드르 리트비넨코 암살도 빼놓을 수 없다. FSB의 러시아 기업인 암살 지시를 폭로한 뒤 2000년 영국으로 망명한 그는 2006년 런던 한 호텔에서 러시아 사업가 일행을 만난 뒤 갑자기 숨졌다. 원인은 그가 호텔에서 마신 홍차 잔에 들어 있던 방사성 물질 폴로늄이었다. 그가 만난 인물 중 한 명은 FSB의 사주를 받은 전직 러시아 연방경호청(FSO) 요원이었다. 이들이 타고 온 비행기 좌석에서도 방사성 물질이 검출됐다.
2020년에는 이중 스파이로 활동하다 미국으로 망명한 러시아 해외정보부(SVR) 간부 알렉산드르 포테예프를 제거하려다 실패했다. 러시아 측은 멕시코 과학자를 정보원으로 포섭해 포테예프의 거주지와 차량 정보 등을 수집하도록 했지만 미 연방수사국(FBI)에 덜미를 잡혔다.
그런데 정보기관의 대표적 비밀공작인 암살이 러시아나 북한 같은 권위주의·독재국가에 의해서만 행해지는 것은 아니다. 이스라엘은 비판적 시선에도 오늘날 암살 공작을 가장 빈번하게 실행하는 국가 중 하나다. 1972년 뮌헨 올림픽 당시 팔레스타인 무장단체 ‘검은 9월단’의 테러에 보복하기 위해 모사드가 벌인 ‘신의 분노’ 작전은 암살 공작의 대표적 사례다.
암살 공작은 정권 차원의 보복이나 정적 제거 수단으로 악용되기도 하지만, 적국의 체제 변화나 붕괴를 촉진하는 도화선이 될 수도 있다. 흉기로 사용될 수 있는 칼이 암을 도려내는 도구가 되기도 하듯, 암살 공작은 그 대상이 누구냐에 따라 정당성의 무게도 달라진다.
출처: 동아일보(2026-09-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