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우정 기자

일러스트=이철원
박정희 대통령이 일본과 단교까지 고려한 적이 있다. 부인 육영수 여사가 재일 교포 문세광의 총에 사망했을 때다. 일본 정부 특사에게 “일본의 태도는 정치와 외교를 떠나 동양적 예의상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며 “일본이 대남 적화 공작 기지가 되고 있다”고 했다. “이런 식이면 일본을 우방으로 인정할 수 없다”고 했다. 외교 자리에서 가슴에 맺힌 원망과 분노를 쏟아낸 것이다.
▶명백한 사건이었다. 일본 여권으로 입국한 재일 교포 문세광이 일본 경찰의 총으로 한국 대통령을 암살하려다 부인을 쏴 죽인 것이다. 그는 최후 진술에서 “조총련에 속았다”고 했다. 일본은 책임을 인정하지 않았다. 총기 수사도 제대로 안 했다. 배후라는 조총련 근처엔 가지도 않았다. 박 대통령은 특사에게 “재일 미국인이 일본 여권을 갖고 일본 관헌의 무기로 미국 대통령을 암살하려다가 부인이 살해됐으면 일본 정부가 이렇게 하겠느냐”고 했다.
▶이 사건 1년 전 일본의 주권을 침해한 김대중 납치 사건이 도쿄에서 일어났다. 일본 내 반한 정서가 극에 달했다. 북한의 하부 기관인 조총련은 일본 좌파를 등에 업고 일본 정치의 강력한 압력 단체로 성장했다. 일본은 한국을 적대시하는 중공과 국교를 맺었다. 일본은 한국을 도와주고 싶지 않았다. 일본 경찰은 한심한 총기 관리 책임을 감추려고 한국 수사 내용과 다른 정보를 일본 언론에 흘려 여론을 돌렸다. 음모론의 씨앗은 일본이 뿌렸다. 북한도 자작극을 주장하며 가세했다.
▶2005년 1월 노무현 정부가 한일협정 문서와 함께 박 대통령의 통한과 분노를 담은 문세광 문서를 공개했다. 그런데 한쪽에선 이 문서를 완전히 다른 눈으로 봤다. 한국과 달랐던 일본 경찰의 수사 내용을 끄집어내 음모론을 펼치기 시작했다. 2005년 3월 1부와 2부에 걸쳐 방송된 MBC 다큐멘터리 ‘이제는 말할 수 있다, 육영수와 문세광 편’이 대표적이다. 암살의 배후는 조총련이 아니라 박 정권일 가능성이 크다는 내용이다.
▶논란의 영화 ‘암살자(들)’은 이 다큐의 문화적 재탕이다. 영화가 발굴해 낸 새로운 사실은 없다. 20년 전 반짝하고 끝난 좌파 음모론을 충무로의 역량으로 되살린 것이다. 이런 황당한 영화에 요즘 대세인 인기 스타들이 총출동했다고 한다. 흥행도 꽤 되는 모양이다. 누군가 노무현 대통령의 죽음이 정치적 음모이고 배우자까지 관여했다는 영화를 만들었다면 어떤 대접을 받았을까. 한국 사회의 기울어진 문화 권력에 또 한 번 혀를 내두른다.
출처: 조선일보(2026.09.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