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규회의 뒤집어보는 상식

게티이미지뱅크

인류는 오래전부터 무언가를 남기기 위해 다양한 재료를 사용해왔다. 고대 메소포타미아인들은 점토판 위에 쐐기문자를 새겼고, 이집트인들은 파피루스를, 중국인들은 죽간(竹簡)을 사용했다. 그 뒤를 이어 등장한 것이 바로 종이였다.

우리는 흔히 ‘종이는 오래간다’고 생각한다. 옛 서책이나 고문서가 수백 년을 버텨온 것을 보면, 종이야말로 기록 보존의 최적 매체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과학적으로 따져보면 종이는 장기 보존에는 취약한 재료다. 종이는 습기와 온도 변화에 민감하고, 시간이 지나면 산성화로 황변과 부식이 발생한다. 실제로 인류의 여러 기록 매체 중에는 종이보다 훨씬 오랫동안 형태를 유지한 것들이 존재한다.

고대 유적에서 발굴된 기록을 보면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점토판과 석비(石碑)다. 기원전 3000년 무렵 수메르인들이 남긴 점토판 문서는 오늘날까지도 거의 원형에 가깝게 보존돼 있다. 불에 구워 단단하게 만든 점토판은 습기나 부패에 강하고, 시간이 흘러도 형태를 잃지 않는다. 또한 금속판이나 돌에 새긴 문자는 천 년, 아니 그 이상을 견딘다.

현대의 종이는 옛날 종이보다 훨씬 약하다. 조선 시대의 한지(韓紙)가 천 년을 견딘다는 평가를 받는 반면, 20세기 이후 만들어진 산업용 종이는 불과 수십 년 만에 노화와 변색이 진행된다. 그 이유는 재료와 제조 공정의 차이에 있다. 전통 한지는 닥나무 섬유를 천연 풀로 엮어 만들었기 때문에 중성에 가깝지만, 현대 종이는 화학 표백제와 산성 접착제를 사용한다.

즉, ‘종이가 오래가는 기록 매체’라는 인식은 한지와 같은 전통 종이에 한정된 이야기다. 산업용 종이는 오히려 디지털 매체보다 짧은 수명을 지닌다.

도서관닷컴 대표

출처: 문화일보(2025-11-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