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현미 논설위원

‘새벽녘에 흥인지문을 나섰다. 성을 따라 걷다 보면, 북악산 푸른 능선이 동쪽으로 뻗어 있고 숙정문 고요한 풍경 사이로 선비의 마음이 넓어진다.’

1879년 늦봄 조선 유생 서넛이 한양도성을 돌며 경치를 감상하는 순성(巡城)에 나섰다. 이들은 흥인지문(동대문)에서 출발해 낙산, 혜화문, 숙정문, 북악산을 거쳐 창의문 쪽으로 걸었다. 이날의 여정은 ‘순성기행’이라는 기행문으로 남았다. 기행문 뒷부분이 소실돼 이들의 다음 행로를 알 수 없지만, 인왕산 방향으로 계속 걸어가 도성을 일주하고 출발한 흥인지문으로 돌아왔을 것이다. 1396년 태조 5년, 한양을 방어하고 도시의 경계를 명확히 하기 위해 축조한 한양도성은 길이 18.6㎞로 현존하는 세계에서 가장 길고 온전하게 남아 있는 도시 성곽이다.

원래 순성은 군인들이 성곽을 돌며 성문과 성벽 등을 살펴보는 일이었으나, 곧 백성들 사이에 명절이나 봄 여름에 소원을 빌거나 경치를 즐기는 놀이로 자리 잡았다. 선비들은 과거를 친 뒤 급제를 기원하며 성곽을 돌기도 했다. 6·25전쟁 이후 일부 구간의 출입 제한으로 끊긴 길은 2022년 청와대 인접 구간 개방으로 다시 이어졌다.

조선 백성들이 소원을 빌며 걷던 도성길이 ‘케이팝 데몬 헌터스’의 열풍에 글로벌 성지가 됐다. 애니메이션 속 K-팝 걸그룹 헌트릭스의 루미와 사자 보이즈의 진우가 만나 정서적 교감을 나누는 낙산 성곽길로 연일 글로벌 팬들이 모여들고 있다. 주인공 동선을 따라 걷는 관련 관광상품은 연말까지 예약이 마감됐다. K-콘텐츠를 보고 즐기는 글로벌 팬들이 한국 역사 속으로 걸어 들어오는 순간이다.

도성길은 이미 외국 관광객들의 인기 높은 K-등산 코스다. 서울 한복판에서 쉽게 접근해, 산책부터 중급 산행까지 다양한 난이도의 산행을 즐긴 뒤, 근처 식당에서 막걸리와 도토리묵으로 마무리하는 것이 기본이다. 성곽길을 걸어보면 안다. 한국의 전통 건축과 나무와 꽃, 풀이 다정하게 어우러진 길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최근 세계적 여행 전문매체의 ‘더 트래지스 어워드’에서 서울은 MZ세대에게 가장 인기 있는 도시로 뽑혔다. 국립중앙박물관은 역대 최고 관람객 기록을 세우고 있다. 한국 문화의 힘이 더욱 단단해지는 새 단계에 올라서고 있다.

출처: 문화일보(2025-08-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