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馬車 덮개로 만든 광부 바지… 세계서 가장 사랑받는 옷 되다!

  • 관리자
  • 22.0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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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행운은 1846~1848년 미국-멕시코 전쟁 결과, 싼값에 할양받은 주 중 하나인 캘리포니아에서 시작되었다. 미국이 캘리포니아를 넘겨받은 해에 잭팟이 터졌다. 1848년 1월 캘리포니아 새크라멘토 근처 강에서 한 노동자가 사금을 발견했다. 처음에는 이를 비밀에 부쳤다. 그러나 결국 많은 금이 발견됐다는 기사가 그해 8월 ‘뉴욕 헤럴드’에 실렸다. 이재(理財)에 밝은 유대인들이 이런 기회를 놓칠 리 없었다. 유대인 수천 명이 서부로 향했다. 당시 육로 대륙 횡단은 위험할 뿐 아니라 시간도 많이 걸렸다. 유대인들은 배편으로 파나마에 도착해 77㎞의 지협을 카누와 도보로 통과한 후 다시 배편으로 서부에 도착해 채광권을 선점하며, 금광 근처에 대지주로 자리 잡았다.

12월 5일 대통령은 의회 연설에서 금 발견을 인정했다. 이듬해에 미국 전역에서 장정 8만명이 몰려들어 캘리포니아 인구는 순식간에 10만명을 돌파했다. 일개 촌이었던 샌프란시스코도 인구 2만의 도시가 되었다. 1852년에는 캘리포니아 인구가 25만명으로 불어났다. 금광은 주변 주에서도 잇달아 발견되어 대륙 철도 사업을 일으킬 정도로 대호황이었다.

1848년 캘리포니아 새크라멘토에서 캐낸 금이 화제가 되면서 미국 전역에서 수많은 이가 서부로 향하는 ‘골드 러시’가 시작됐다. 이는 서부 개척은 물론이고 우편과 송금 등 통신과 금융 발전으로 이어졌다. 이 기회를 놓치지 않은 일부 유대인은 미국 서부 채광권을 차지해 부를 축적했다. 리바이 스트라우스는 금광을 선점하진 못했지만 청바지를 만들어내 큰돈을 벌었다. 그의 청바지는 오늘날에도 자유와 젊음, 시대를 초월한 실용의 상징으로 통한다.

10대 때 아버지 여의고 독일서 美로
골드러시는 미국을 부강하게 만드는 계기가 되어 서부 개발과 함께 영토를 확장할 수 있었다. 그리고 보호구역 설정으로 인디언의 영향력이 줄어들었고 역마차 제도가 생겼다. 이로써 우편 제도와 송금 제도가 발전했다. 역마차는 좌석 등급이 세 가지 있었는데, 진흙탕이나 언덕이 나오면 1등 요금 승객은 앉아 있고, 2등 요금 승객은 마차에서 내려 걷고, 나머지 승객은 마차를 밀었다.

남북전쟁 중인 1862년에는 홈스테드법이 도입되어 5년간 서부 개척에 종사한 사람들에게 토지 160에이커를 무상으로 주어 개척 활동을 촉진했다. 1867년 미국은 알래스카를 러시아에서 헐값에 사들였다. 1869년에는 대륙횡단철도가 개설되어 급속한 경제 발전이 이루어졌다. 철도를 따라 전봇대가 세워져 전보가 등장하자, 금융 산업 등 정보 산업이 급속히 발전했다. 모두 골드러시의 영향이었다. 이후 캘리포니아는 가장 인구가 많은 주가 된다.

골드러시 덕분에 돈 번 유대인이 있다. 리바이 스트라우스(Levi Strauss)다. 그는 1829년 독일의 한 가난한 유대인 가정에서 7남매의 막내로 태어났다. 리바이는 십대 시절부터 아버지를 따라 행상에 나섰다. 아버지가 폐결핵으로 세상을 떠나며 그에게 당부했다. “아들아, 하느님이 우리 인간을 심판할 때 맨 먼저 물어보는 말이 뭔지 아니? ‘너는 진정 네 할 일을 다 하였는가?’라는 질문이란다.” 이 말이 평생 리바이의 화두가 되었다.

아버지를 잃고 살길이 막막해진 가족은 유대인도 평등한 대접을 받는 미국행을 결심했다. 작은아버지 가족이 먼저 뉴욕으로 이민 가서 자리 잡은 것도 한몫했다. 리바이가 18세가 되던 해인 1847년 일가는 뉴욕으로 건너갔다. 우선 사는 게 급해 리바이는 공부를 포기하고 작은아버지의 옷 가게에서 일을 배웠다. 그런데 고된 일에 비해 벌이가 신통치 않았다. 켄터키에서 천과 의류 행상도 해보았지만 마찬가지였다.

골드러시 시대라 리바이도 서부로 향했다.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한 그는 크게 실망했다. 금광은 이미 먼저 온 사람들이 다 선점해 결국 그는 다시 천과 의류 행상을 해야만 했다. 행상이 제법 자리 잡을 무렵 사고가 터졌다. 마차 지붕으로 쓸 범포(帆布)를 사 간 광부가 천에서 물이 샌다며 환불을 요구했다. 원래 범포는 돛에 사용하는 튼튼하고 질긴 천이었다. 리바이는 당장 환불해줄 현금이 없었다. 그는 광부의 해진 바지를 보고 환불 대신 그 천으로 튼튼한 광산 작업용 바지를 만들어 주겠다고 제안했다. 이후 범포로 만든 바지는 광부들에게 인기가 많아 잘 팔렸다. 리바이의 가게는 도매와 소매 모두에서 큰 성공을 거두었다.

하지만 주머니 재봉 선이 자주 터졌다. 주머니에 넣은 연장과 광물 무게를 이기지 못했기 때문이다. 더 질긴 바지가 필요했다. 그 무렵 양복점을 하던 유대인 재단사 제이컵(야곱) 데이비스가 리바이에게 동업을 제의해 왔다. 제이컵은 천을 단단하게 고정하는 구리로 만든 징 ‘리벳’(Rivet)을 바지 주머니에 박는 아이디어로 이런 문제를 해결하고 있었다. 그리고 주머니 속의 작은 주머니는 당시 유행인 회중시계를 넣을 수 있도록 고안되었다. 그는 일반 바지의 3배 값으로 바지를 팔고 있었지만 특허를 낼 돈은 없었다. 리바이에게도 특별한 아이디어가 있었다. 그는 자신이 만든 바지에 독사들이 싫어하는 인디고라는 자연 염료로 청색 물을 들였다. 광부들이 사막을 다닐 때 독사의 위험이 많았기 때문이다. 리바이는 인디고 청색이 독사를 물리칠 뿐 아니라 사람들에게 활력을 줄 것이라고 확신했다. 리바이는 제이컵을 책임자로 고용하고 공동 명의로 특허를 신청했다. 하지만 특허 신청은 이런저런 이유로 여러 번 거부되었다. 그러나 리바이는 포기하지 않았다.

마침내 1873년 5월 20일 리벳을 박아 넣은 남청색 바지의 특허가 승인됐다. 미국 최초의 의류 브랜드인 ‘리바이스 청바지’가 공식 탄생한 날이다. 이후 리바이스 청바지는 불티나게 팔렸다. 그런데 바지가 조금 무겁다는 소비자의 불만이 있었다. 그래서 리바이는 옷감을 가벼우면서도 질긴 데님으로 바꾸었다. 데님은 프랑스 남부 도시 님(Nîmes)의 특산물로 고급 면직물이다. 그리고 진(Jeans)이라는 이름은 데님 청바지를 이탈리아 제노바 선원들이 많이 입어, 제노바를 지칭하는 프랑스어(Gênes)에서 비롯됐다고 한다.

1890년 청바지의 특허 시효가 만료되자 다른 제조사들도 앞다퉈 진 바지를 만들었다. 첫사랑을 잊지 못해 독신으로 여생을 마친 리바이는 샌프란시스코 유대인 사회의 대부였다. 그는 버클리 대학에 장학 기금을 28개 조성하는 등 여러 분야에서 자선 활동을 펼쳤고, 재산을 고아원과 양로원 등에 기부하고 1902년 세상을 떠났다.

1차 세계대전은 청바지가 미국을 넘어 세계 상품으로 발전한 계기가 되었다. 유럽 전선에 참전한 미군들이 진 바지를 즐겨 입었다. 이후 1934년에는 여성용 청바지가 처음 등장했다. 당시 유럽에서는 여자들이 바지를 입으면 벌금형을 받았는데, 청바지를 입은 미국 여성들의 유럽 여행이 많아지면서 자연스럽게 폐지되었다.

청바지는 1950~60년대에 제임스 딘, 말런 브랜도, 엘비스 프레슬리, 매릴린 먼로 등 당대 스타들이 즐겨 입으면서 유명해졌다. 제임스 딘은 영화 ‘이유 없는 반항’에서 청바지를 입고 형언할 수 없는 깊고 슬픈 눈빛으로 관객들을 사로잡았다. 이를 계기로 청바지는 일약 자유와 반항의 상징이 되었고, 청바지는 세계 젊은이들 사이에서 폭발적 인기를 끌었다.

1차대전 참전 미군 통해 유럽 전파
청바지는 흔하지만 독특한 매력을 갖고 있다. 대중적이면서 독창적이고, 글로벌하다. 또 편하면서 강인한 복장이다. 심지어 청바지는 옷이기 이전에 하나의 사상이요 주의(主義)를 대표한다. 청바지는 다섯 가지 없음(No)을 표현한다. 노 클래스(계급 초월), 노 에이지(연령 초월), 노 시즌(계절 초월), 노 섹스(성별 초월), 노 보더(국경 초월). 이렇듯 청바지는 평등사상을 대변하며 계급사회 철폐를 의미한다. 이렇듯 기득권층에 대한 저항의 상징이자,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고 외치는 세대의 평상복이 되었다. 게다가 입을 옷을 고르는 데 소비하는 시간조차 아까운 기업가들에게 청바지는 노 타임(골라 입을 시간이 필요 없음)을 더했다. 실용성과 멋을 모두 지닌 청바지는 남녀노소 모두에게 사랑받고 있다.

美 의류산업 장악한 유대인
1820년대부터 1870년대까지 독일 지역에서 미국으로 유대인들이 몰려왔다. 특히 1848년 3월 혁명 실패에 실망한 유대인들이 자유를 찾아 미국으로 건너왔다. 가난한 이민자들은 뉴욕의 봉제업에 종사했다. 그 뒤 러시아 황제가 암살된 1881년 이후 대박해(포그롬·pogrom)를 피해 온 동유럽 유대인 200만명은 뉴욕 항구에 도착하자마자 맨해튼 이스트사이드 남쪽 봉제 공장으로 직행해 일자리와 숙식을 해결했다. 당시 미국 유대인 노동자의 60% 이상이 봉제업에 종사했다. 이들은 작은 방 하나에 12명이 모여 일주일에 70시간 이상 일했다. 하루 12~15시간 열악한 환경에서 고된 재봉 일을 하고도 일당은 형편없었다.

그 뒤 일부는 돈을 모아 천과 의류 행상을 시작했으며, 일부는 옷 가게를 열었고, 일부는 의류 공장 주인이 되었다. 1888년에는 뉴욕 의류 상회 240곳 거의 모두, 1890년에는 뉴욕 의류 공장의 95%를 유대인이 소유했다. 1913년에는 공장을 무려 1만7000곳 소유한 유대인 의류 산업이 뉴욕 최대 산업이었다. 20세기 초까지 철강, 석유와 함께 미국의 3대 산업이었던 의류 산업 종사자의 태반이 유대인이었다. 당시 철강은 JP모건의 ‘유에스스틸’이, 석유는 록펠러의 ‘스탠더드오일’이 장악하고 있었으니 미국 3대 산업이 모두 유대인 수중에 있었다.

<펌> 조선일보(2022.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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