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성은 소설가·세명대 교수

다리목에 몇 남지 않은 한약초재상에서는 아직도 20여 년 전과 똑같은 냄새가 풍겨 오고 있었다. 여지없이 과거의 풍경이 밀려왔다. 파도처럼, 저 다리 아래로 작은 배 한 척이 흘러갔다. 맞은편에는 대형 백화점이 보였다. 옛 시청 자리가 이렇게 변할 줄은 그 시절에는 누구도 알지 못했을 것이다. 이곳에서 왼편으로 꺾으면 건어물 시장과 자갈치 시장이 나왔고 대로를 건너면 남포동이었다.

중구 남포동에서 만나기로 한 건 누구의 아이디어였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다만 내가 제일 들뜬 건 확실했다. 문학으로 인연을 맺은 선후배가 모여서 추억 팔이를 할 요량이었다. 나는 약속 시간보다 이르게 선배를 먼저 만나 남포동 일대를 조금 걸을 작정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그도 나와 생각이 같았다. 우리는 우선 정처 없이 걷기로 했고, 그건 시간 여행을 하자는 의미이기도 했다.

한때 내게는 남포동이 곧 부산, 아니, 세계의 전부였다. 그래서 누군가 부산에 오면 되도록 남포동을 소개하려 했다. 해운대, 광안리, 서면처럼 잘 갖춰지고 화려한 곳도 많지만 민낯으로 내보이는 부산의 진솔한 얼굴은 꼭 구도심의 정취라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부영극장과 국도극장, 남포문고와 문우당서림이 그곳에 있었다. 통기타를 사기 위해 들렀던 악기 상점이나 미용실, 빵집과 커피숍도 죄다 남포동에 있었다. 비가 오는 날이면 닭꼬치 가게에 앉아서 하루치 넋두리를 늘어놓기도 했고, 고등어구이집이나 포장마차에 모여든 손님들과 맥락 없이 겸상을 하기도 했다.

발길은 남포동에서 보수동으로, 그리고 옛 인쇄소 골목이 있는 동광동으로 이어졌다. 그런 중에 우리 눈에 노란색 간판의 ‘계림’이라는 글자가 들어왔다. 나로선 상호가 생소했지만, 이미 문을 열고 들어가는 선배를 뒤따를 수밖에 없었다. 선배는 메뉴를 스윽 훑더니 북면 막걸리와 굴전을 주문했다. 벽에는 몇몇 글귀가 정자로 적혀 있었다.

‘천상병 시인님을 추모합니다!’ 그 문장은 오래된 벽지의 일부 같았다. 나중에야 알게 된 사실이지만 그곳은 부산의 예술가들이 즐겨 찾아온 노포였다. 선배와 나의 교집합은 문학과 영화였고, 그게 삶의 방향타가 되었다는 사실이 은근한 자부심이기도 했다. 얼마 후 우리가 보내준 주소지로 달려온 극작가 후배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마침 주인장이 가득 담아온 막걸리가 주전자에서 넘쳐흘렀고, 나는 얼른 주둥이에 잔을 가져다 댔다.

“이런 데를 어떻게 찾아왔대요?” 후배가 물었다. 신이 난 선배는 생각 없이 걷다 보니 여기 와 있었다고 능청스레 답했다. “빙빙 돌아 불쑥 들어가 버렸는데, 그곳이 마음에 들어 쭉 눌러버린 경험 말이야. 다들 그렇게 살아가고 있지 않나?”

그날 우리는 여느 때처럼 문학에 대해 언쟁을 벌이고 노래를 부르고 술을 쏟기도 했다. 나는 잠깐 문학청년이던 그때로 돌아간 것 같아 기꺼웠다. “부산에 젊은 시인이 사라져가고 있어요.” “시인이?” “아니, 젊은이가 사라져간다고.”

무대 위에서 연극의 대사를 입말에 맞게 고쳐가듯 우리의 대화는 무르익었다. 릴레이처럼 계속 잔이 돌았다. 정신을 차리려 잠시 바깥으로 나왔을 때, 하늘 저편이 어둑어둑하게 짙어가고 있었다. 마침 노란 간판의 환한 불빛이 눈앞으로 쏟아져 내렸다. ‘추억, 향기, story...’ 간판에 적힌 글자에 눈길이 닿았다. 상투적이고 관습적인 그 단어들이 문득 내 마음을 후벼파듯 했다.

‘모든 게 사라져가고 있다.’ 나는 그 말을 하기 위해 다시 문을 열어젖혔다. 무엇이라도 되찾고 싶은 밤이었다.

출처: 조선일보(2025.11.27